한국인이라면 좋아할리가 없는 그 인물, 이토 히로부미.
당연히 나 역시도 이 인물에 호의를 보이기는 싫지만, 메이지시대에 있어 이 인물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강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 감각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모든 행적이 성공 혹은 성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3차 이토 내각에서 이토는 아군 하나 없이 내각을 구성했고, 결국 얼마 안가 사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의 정치 감각을 고평가하는 이유는, 그 이후의 행적이 과감하고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자유민권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일본의 정치계는 메이지 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번벌파와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는 민권파(혹은 민당파)로 나뉘었다.
민권파는 대동단결운동 이후 이타가키 다이스테와 고토 쇼지로를 중심으로 한 자유당과
오쿠마 시게노부를 중심으로 한 진보당의 구도가 확립되었고,
이후 지조증징문제와 이토의 창당 시도 등을 계기로 민당파 양당은 헌정당으로 통합되었다.
1898년(메이지31) 시행된 5회 총선거에서 자유당은 105석, 진보당은 104석을 획득한 데 비해
번벌파의 대리인 격인 국민협회는 29석을 획득하는 데 그쳤고,
이후 헌정당으로 통합되면서 제국의회는 209석의 거대정당인 헌정당이 독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국에서 이토 히로부미 따위는 쉽사리 밀어낼 만 했고, 실제로 밀려났다.
하지만 이런 정국에서 이토가 눈 여겨 본 포인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포인트는 메이지시대 정국을 주도한 것은 한상 번벌파였으며,
그 번벌파 중 그나마 민권파에 호의적이었던 게 이토였다는 것이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도 민권파와 손을 잡긴했지만, 그건 필요에 의한 것이었을 뿐,
1차 마쓰카타 내각이 행했던 선거간섭 등의 면모로 보아 마쓰카타는 민권파에 호의적일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토와 마쓰카타를 제외한 번벌파는 전부 초연주의를 강조하며 정당활동 자체를 혐오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육군을 장악해 조슈벌을 이끌고 야마가타파를 구성한 그 야마가타 아리토모 말이다.
두번째 포인트는 메이지 덴노가 그 당시 정부 주요 관료 중 가장 신뢰하고 의지했던 대상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 본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의 효과는 입헌정우회의 창당과 맞물리기에 후술하겠지만,
덴노의 지지 하나만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게다가 청일전쟁 이후 아시아 유일의 문명국이라는 의식이 일본 전체에 퍼져나갔고
그 근간으로 민간에서마저도 덴노 헤이카가 주목받는 상황에서, 메이지 덴노의 지지는 곧 이토의 강력한 입지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 한 번 사임한다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관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야마가타나 마츠카타와의 권력싸움에서 밀린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토 히로부미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민당파 여러분 나 없이 정치해보세요
1898년 6월 일본제국의 8번째 총리로 헌정당의 오쿠마 시게노부가 내정되었다.
당연히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 악물고 거부하려했겠지만, 300석 중 209석을 헌정당이 확보한 정국이었기에
번벌파가 무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정국이었다.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는 외무대신을 겸임하며 외교 분야를 총괄했고,
그 대신 내무대신에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내정해 내정 전반을 담당케했다.
총리는 오쿠마지만 정권은 둘로 분산되었고, 일종의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이 균형을 주도한 오쿠마(大隈)와 이타가키(板垣)의 이름에서 따와
1차 오쿠마 내각은 와이한(隈板) 내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용어를 선호하고 있다.
와이한 내각은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으로 발족했고, 실제로 주요 장관들도 전부 민권파였다.
예외라고 한다면 육군대신 가쓰라 다로와 해군대신 사이고 주도는 번벌파 군인이었는데
이는 현역무관제로 인해 육해군대신은 현직 군인만이 임명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이한 내각의 각료를 보면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를 중심으로 구 진보당계가 4명
(오쿠마 시게노부, 오자키 유키오, 오히가시 기테츠, 오이시 마사미)
내무대신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구 자유당계가 3명이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마츠다 마사히사, 하야시 유조)
그리고 여기에 선술한 번벌차 군인이 2명
(가츠라 다로, 사이고 주도)
군인 둘을 제외하면 4대3으로 진보당계가 조금 더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걸 분란의 여지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이정도를 가지고 균형 논하는 건 과도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란은 와이한 내각 출범 약 두달 후 발생했다.
문부대신 오자키 유키오는 정계의 기린아로 불리던 정치 유망주였고
자유민권운동 과정에서는 오쿠마 시게노부의 진보당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와이한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39세의 나이에 첫입각했으니 그의 정치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을 듯 했지만
사실 온갖 억까와 고생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평생동안 25선을 기록한 국회의원으로 세계보유자이니 괜찮겠지?
(당선 횟수에서 유추 가능하듯 2차대전 이후까지 그의 이름은 계속 나온다)
1898년 8월 22일. 오자키 유키오 문부대신은 제육교육회의 다과회에 초청받았고,
여기서 물질만능부의에 대한 비판과 외국인 자녀 이지메 문제에 대한 지적 등을 내용으로 하는 연설을 가지게 되었다.
연설의 전문은 공개되지 않아 아무도 모르지만, 문제는 이 연설이 어떻게 보도되었는가이다.
다음날 도쿄일일신문은 오자키 문부대신의 연설내용을 보도했는데, 여기에 이렇게 적었다.
미국은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한 나라다.
(중략. 이후 미국식 공화정체를 비난하며, 일본이 공화정이 되면)
미쓰이, 미쓰비시에서 대통령을 배출할 것이다.
오자키 유키오의 공화정연설사건.
그런데 중요한 건 공화정체는 메이지 덴노가 하사한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채택한 메이지 일본의 정치체제라는 것이다.
대일본제국을 아시아 유일의 문명국으로 만든 요소 중 하나이며 덴노헤이카의 자애로운 산물인데
이를 감히 부정했다.
즉 이 명제는 반역이었다.
그런데, 과연 오자키 문부대신이 이런 언행을 감행했을까?
비록 연설 전문이 밝혀지지 않았고, 오자키도 죽기 전까지 공화정연설사건의 진위를 밝히지 않았다.
현 시점에서 유추를 해보자면, 당시 보도된 연설의 내용은 왜곡되고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며 미국의 정치를 비판했을 가능성은 크나
이것이 공화정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시킬 정도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바로 공화정연설사건을 보도한 도쿄일일신문이었다.
당시 도쿄일일신문의 사장은 이토 야지로.
조슈번 출신으로 조슈 삼걸 모두와 친분이 깊으며, 3차 이토 내각에서 농상무대신을 역임한 인물이다.
즉 도쿄일일신문은 번벌파의 어용지로 이용될 여지가 큰 신문사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공화정연설의 날조 가능성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물론 진실은 모른다. 오자키가 죽기 전 '공화정연설은 이토 야지로가 날조한 것'이라 하고 죽었으면 모를까.
궁중은 항의했고, 내각 내에서도 자유당계와 육해군대신이 오자키를 공격했다.
여론도 들끓었고 오자키 유키오는 결국 문부대신직에서 사임했다.
그렇다면 후임 문부대신이 중요했는데, 하필 그게 오자키의 베스트 프렌드
진보당계 이누카이 츠요시였다.
자유당계는 실책사유를 제공한 진보당계가 아닌 자유당계에서 문부대신을 배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는 헌정당 내에서 진보당계와 자유당계가 충돌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얼마 안가 헌정당은 해산했고, 자유당계는 헌정당을 탈당해 헌정당을, 진보당계는 헌정본당을 설립했다.
헌정당이 해산됨과 동시에 자유당계(헌정당) 국무대신들은 전부 사표를 제출했고,
그렇게 이누카이 츠요시가 문부대신에 임명되고 며칠 후 내각이 붕괴하게 되었다.
민당파가 기적의 통합을 이루었지만 그 영광은 세달 남짓 진행되는 데에 그쳤다.
이후 헌정당(자유당계)는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고령을 이유로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토 쇼지로가 사망해
호시 도오루를 중심으로 개편을 거듭했으며,
헌정본당 역시 오쿠마 시게노부의 정계 은퇴로 구심점을 잃어 세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이는 반대로 번벌파의 발언권이 강해지는 효과를 낳았으며,
그렇기에 다음 총리에, 그 누구보다도 정당활동에 대한 혐오를 거칠게 표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내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1899년 청에서 외국인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본 근현대사 > 메이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헌정우회의 탄생 (0) | 2024.12.08 |
---|---|
청일전쟁 직후의 국제정세와 일본 (1) | 2024.12.06 |
전후 공황과 지조증징 이슈 (4) | 2024.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