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에 수도라 함은 성곽과 궁궐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가 돋보인다.
서울의 경우 한양도성과 5대궁,
개성 역시도 개성부가 외성과 나성으로 둘러쌓여 있고 그 안에 만월대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에도 명과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은 이중으로 두꺼운 성벽이 둘러싼 형태 안에 자금성과 중남해가 위치해있었다.
유럽의 경우 근대화 및 도시 확장으로 인해 이러한 면모가 퇴색된 감이 없지 않지만
빈의 호프부르크 왕궁,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 로마와 프랑스의 주요 궁전은 성벽으로 둘러쌓인 구시가지 내부에 있었다.
그런데 이건 일반적인 예시일 뿐 예외도 있다.
바로 일본이다.
이렇게 말을 하면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덴노가 거주하는 황거는 과거 에도 막부의 중심지였던 에도 성 자리이며,
교토에는 니조성이, 오사카에는 오사카성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100개의 명성이 있다고 관광 홍보를 하는 일본인데, 수도에 성이 없다는 건 이해가 안될 가능성이 높지만
놀랍게도 교토와 나라에는 성이 없다.
고분시대-아스카시대-나라시대-헤이안시대
서기 3세기 중반부터 11세기 중후반에 이르는 기간으로, 이 기간동안 일본이 성을 쌓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멸망한 후, 일본은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다음 일본을 노릴 것이라 봤고
백촌강전투를 전후로 하여 규슈 북부에 백제유민들을 기용해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성곽은 기존의 일본식 성곽과 차이를 보인다 하여 조선싱 성곽으로 불렀는데,
다자이후 북쪽 시오지산의 오노죠(御野城)가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러한 성곽의 특징이라면 시가지와는 거리가 있는 주요 거점에만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내가 일본고대사를 잘 알지 못해 모든 자료를 체크하기는 힘들지만
기록 상에서 보더라도 일본의 축성기록은 평야나 주요 도시가 아닌 군사적 거점에 설치했고,
인구와 재산의 보호보다는 군사적 효율성에 집착한 듯한 모습이 보이곤 한다.
이는 삼국시대 축성된 백제의 공산성, 고구려의 평양성과 비교되는 면모이다.
(이 두성은 모두 삼국시대의 성곽자리에 고려와 조선이 추가 축성한 것)
그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내전 혹은 일본 내의 세력 다툼 과정이다.
일본은 4세기가 되면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왕정국가로 통일되어 갔음을 유추할 수 있고,
5세기가 되면 그 통일국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도 내전과 다툼은 있었지만, 겐페이 핫센 이전까지는 전국적인 군사 충돌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누 토벌과 도호쿠 개척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성곽도시를 건설할 계기가 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 잊을만하면 국경 뚫리고 유목민족의 약탈 위협에 노출되었으며,
유럽의 경우에도 바이킹과 마자르 등 북방계 민족의 약탈에 시달려야했다.
반면 일본은 아이누의 약탈이 수도 인근꺼지 뻗힌 것도 아니었고
한국과 중국, 여진 해적의 침략 위험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이러니 수도에 성곽을 쌓을 필요가 적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수도가 위협받을 상황이 있지는 않겠는가?
수도를 향한 군사활동이 외적에 의한 것으로 한정되기만 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일본은 수도 주변에 요새를 설치했는데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아스카이다.
아스카무라 주변 산지에는 요새가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유적이 확인되었고,
이 요새들이 성곽의 역할을 대신했음을 알 수 있다.
교토 역시 최소한의 수비 역할을 기대한 것인지 담장을 세운 정황이 보이고,
이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교토의 남문이었던 나생문의 동쪽에 세웠다는 도지이다.
그런데 나생문은 자료를 보면 교토의 대문이면 모를까 성문이라고 하기에는 수비적 역할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과거 교토에 있었던 담장을 토성이나 석성에 비유하기에는 한계가 크다.
참고로 교토 니조성은 전국시대 교토 방문을 위해 세운 성으로
혼노지의 변 때에 파괴되었다가 에도시대에 지금의 니조성을 세운 것이다.
위치를 보면 예상 가능하듯, 수비적 기능은 조금도 없다.
이런 식의 수도 방어 시스템은 우리나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리다. 경주 역시 성곽이 없다.
월성은 사실 궁전으로 확인되었고, 경주 내에도 돌로 된 담장은 있었으나 성벽의 형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 대신 경주의 동서남북으로 요새를 쌓았고, 주요 평지에 군사적 시설을 확충했다.
경주에 성이 있다고?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경주성은 조선시대에 쌓은 것이다. 신라의 궁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볼 수 있는 일본성은 무엇이냐?
전부 전국시대(일부는 에도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전국시대 후기로 갈 수록 산간에서 내려와 평지성이나 평산성의 모습으로 변모해간다.
그 이전에 쌓은 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정치적 이유 및 국내 군사충돌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세운 성은
왠만해선 무로마치 시대 중후반(15세기 중반) 이후에 세워진 성들이다.
그리고 이 성들은 다이묘의 거점에 설치되었을 뿐, 일본의 정치/행정적 수도에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스카, 나라, 교토 등 헤이안시대까지 일본에서 수도로 사용된 지역에서는 성곽을 확인할 수 없다.
시가지를 둘러쌓는 성벽을 대신하여 주변 거점에 요새를 쌓아 수도를 보호했다.이러한 형태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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