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정우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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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8년(메이지31) 11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총리에 내정되면서 2차 야마가타 내각이 출범했다.내각 내에는 번벌파가 꽉꽉 들이찼으며, 야마가타답게 주요 안건들은 전반적으로 통과되었다.그래도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의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에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헌정당(구 자유당계)과 연계하여 전반적인 안건을 원하는대로 통과시켜 나갈 수 있었다.그렇게나 싸워댔던 지조증징 법안은 2차 야마가타 내각 출범 직후 통과되었으며,1899년(메이지32)에는 내각에 대한 개편안 역시 통과되었다.여기서 말하는 내각에 대한 개편안은 문관임용령과 문관분한령을 말하는 것인데,문관임용령은 정당 소속인의 내각 임용을 금지하는 법이었고, 문관분한령은 내각의 교체에도 국무대신과 관료들의 위치를 보전시켜주는 법이었으니,이는 제..
와이한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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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한국인이라면 좋아할리가 없는 그 인물, 이토 히로부미.당연히 나 역시도 이 인물에 호의를 보이기는 싫지만, 메이지시대에 있어 이 인물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강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 감각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모든 행적이 성공 혹은 성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3차 이토 내각에서 이토는 아군 하나 없이 내각을 구성했고, 결국 얼마 안가 사임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의 정치 감각을 고평가하는 이유는, 그 이후의 행적이 과감하고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자유민권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일본의 정치계는 메이지 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번벌파와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는 민권파(혹은 민당파)로 나뉘었다.민권파는 대동단결운동 이후 이타가키 다이스테와 고토 쇼지로를 중심으로 한 자..
청일전쟁 직후의 국제정세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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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6년(메이지28) 을미사변이 발생했고,아무리 조선을 쌩무시하던 일본이라지만 일단 을미사변의 주동자인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조선에 둘 수는 없었다.미우라 고로가 귀국된 후 후임 조선주재 일본공사에는 고무라 주타로가 내정되었다.무츠 무네미츠의 측근이기도 했던 고무라였기에, 고무라가 조선에서 진행할 임무는 기존 대조선정책의 유지라고 볼 수 있겠다.하지만 얼마 안가 아관파천이 진행되었고, 일본의 조선정책은 큰 변곡점을 맞을 수 밖에 없었기에고무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조선 내에서 일본이 그간 차지한 권위와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었다.고무라는 즉시 이에 대한 협상을 가졌고, 조선주재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와 하나의 비밀 각서를 체결했다.이것이 바로 '베베르 고무라 각서'이다. 동년 비슷..
전후 공황과 지조증징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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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6년(메이지29) 새로운 총리에 오른 것은 마쓰카타 마사요시였다.마쓰카타는 1892년(메이지25)의 선거간섭 이후 이토 히로부미 와는 정치적으로 척을 진 상태였고그렇기에 내각에 이토파 혹은 이토 내각의 관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전임 내각이 2차 이토 내각이 아닌, 구로다 임시 내각이었기에2차 마쓰카타 내각에는 2차 이토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유임되었지만전부 며칠 내로 교체되었다. 예를 들자면외무대신과 문부대신을 겸임하던 사이온지 긴모치는외무대신에 오쿠마 시게노부, 문부대신에는 하치스카 모토아키가,내무대신은 이토가 영입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대신 가바야마 스케노리 전 대만총독이,육군대신은 오랜 기간 육군대신을 역임했던 오야마 이와오 대신 다카시마 도모노스케가,사법대신에는 기요우라 게이고가 내정되었다...
삼국간섭과 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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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해권 장악은 순탄하게 이루어질 일이었다.물론 변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조선이 카를 베베르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와 교류하고, 이완용 등 친러파 신진관료를 중용하고 있다지만외교적인 방법으로 러시아는 협상이 가능한 상대였기 때문이다.1894년(메이지27) 청일전쟁이 한참이던 상황에서 러시아 알렉산드르 3세가 붕어했다.그리고 오쓰에서 칼에 맞았던 니콜라이 황태자가 니콜라이 2세로 즉위했다.오쓰 사건의 앙금이 남지는 않았기에 러일 양측의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고,1896년(메이지29) 니콜라이 황태자 즉위식에 일본 대표로 참여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즉위식 후 러시..
시모노세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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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우장이 넘어가면서 요동과 산해관 사이 그 모든 군사적 방해물이 사라졌다.산해관에서 청이 마지막 발악이야 하겠지만, 주력군이 무너졌으니 결과는 뻔하고, 그 다음은 북경이다.북경에 있는 청 조정이 도망칠 시간도 부족했다. 산동에서 북진하는 일본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갈 곳도 성도가 최선인데, 지구전으로 가는 것 자체가 수모였다.아니 운 나쁘면 가다가 잡힌다. 결국 청은 종전협상을 제의하며 항복의지를 보이게 되었다.근데 일본은 싫대.북경 먹을 거고 청은 뒤지래. 이토 히로부미와 무츠 무네미츠는 전쟁을 끝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그냥 이참에 청을 부숴버리자는 생각이었다.그러니 청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공친왕이나 이홍장이 직접 일본에 오지 않는 이상 협상은 없으며,와도 협상따위 질질 끌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그..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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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풍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대로 상륙해 성환(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중인 청군을 격퇴했다.이후 경기도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평양성으로 향한 청군을, 남으로는 전라도의 동학군을 상대했으며,우금치에서 동학군은 궤멸, 평양성 전투도 조선 관군이 암묵적으로 청을 지원했음에도 일본이 승리했다.전장은 요동으로 넘어갔으며, 웨이하이 전투에서 청이 자랑하는 북양함대는 전멸했다.대만과 펑후열도가 일본의 손에 넘어갔고우장 개항장이 함락되었고 일본군이 산동반도에 상륙해 북경을 향해 진군하자청은 주력군이 전멸하여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고,이토 히로부미 내각총리대신과 무츠 무네미츠 외무대신이 종전협상을 거부하자이홍장이 노신을 끌고 이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1895..
조약개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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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조약개정 3조약개정 2조약개정 1이와쿠라 사절단대정봉환과 메이지 덴노의 즉위 사실은 당연히 외교관계가 설정된 모든 국가에 전달되어야 할 사항이었고,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경우 금방 보낼 수 있었지mtw31082.tistory.com3편은 여기로 조약개정에 한정되지 않고 2차 이토 내각의 청일전쟁 이전 외교 활동을 다룰 것이다.물론 핵심은 영일통상항해조약이다.부제목은 '조약개정의 완성'정도가 좋겠다.정한론 논쟁이고, 임오군란 이후 재점화된 정한론 열풍이건,방법론에 차이가 있었을 뿐 조선을 장기적인 점령대상으로 본 건 번벌파와 민권파가 동일했다. 1892년(메이지25) 2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2차 이토 내각은 출범과 동시에 국회를 장악했고 선거 간섭으로 번벌파에 반발하던 민권파를 회유하려 노력했는데,이타가..
청일전쟁 직전의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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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메이지 유신을 통한 일본의 산업혁명은 분명 성공했다.이 부분을 부정할 수는 없다.그런데 시대가 시대라서, 메이지 시대의 산업혁명은 큰 한계점을 대동하고 있었다.바로 산업혁명으로 성장한 기업들은 내수시장에만 의존했다는 것이었다.물론 무역 수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세자주권이 없어 이에 의존하기는 힘들고,애초에 원자재는 주로 외국에서 수입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철광석은 수입 없이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그렇다고 외국에 일본 물품을 팔아봤자 큰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구미 열강의 식민지는 애초에 그 존재가 구미 열강의 상품을 판매할 목적도 있었기에 일본 상품이 낄 틈이 없었다.그나마 청과 조선에 대해, 특히 대조선 무역에서는 대규모의 흑자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나상인을 중심으로 격화되던 조선의 반외세..
1890년의 경제공황과 해외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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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일본의 산업 혁명은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성공적이었다.1884년(메이지17)부터 관영공장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민간기업에 공장을 불하했는데,이는 오히려 민간기업과 자본의 성장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해원대를 기반으로 한 미쓰비시 상사는 해운 사업으로 대박이 났고,소매업으로 시작한 미쓰이는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민관합동 운수회사를 설립했다. 그런데 이러한 성장은 영원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말이다.1890년 일본에 경제공황이 들이닥쳤다.마쓰카타 재정으로 시작된 디플레이션 및 증세의 역효과는 시간이 지나며 퇴색되었지만기업체들의 성장과 무역량의 증가로 점차 일본 경제는 세계경제의 일부로 완전히 흡수되었다.그리고 이 부분이 문제였다.미국에서 시작된 대불황의 여파가 일본에 덮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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