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초반기의 국가주의
메이지 후반의 정치 분위기시간을 조금 돌려서 메이지 후반부의 정치 이야기를 해보겠다.1900년대 초반 일본의 정계는 네개의 파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겠다.하나는 초연주의 번벌파. 야마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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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국가주의의 화력은 약해지지 아니었지만 점차 위기거리가 늘어나고 있기는 했다.
가장 큰 계기는 역시나 쌀 소동이었다.
이제 일본인들은 국가, 혹은 국체인 덴노헤이카를 위한 정치적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일단 목전에 닥친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해졌던 것이었다.
군축에 대한 호응도가 좋아지고, 번벌파가 몰락하기 시작하며 자신들을 지원해줄 세력도 줄어들던 상황에서
유존사, 낭인회, 흑룡회 등이 내세울 수 있는 건 덴노헤이카를 위해 공산주의자를 박멸하자는 것과
일본을 지키기 위해 시베리아에 군대를 더 보내자는 것뿐이었다.
1920년(다이쇼9) 니콜라옙스크 나 아무레에서 야코프 트라키친이 이끄는 적군에 의해 백여명의 일본인 포로가 학살당하는
니항 사건(니콜라옙스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반러반공을 강조하던 국가주의자들이 다시 한 번 복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었으나
당시 총리는 하라 다카시였고, 일본 정부의 기본 방침은 철군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물론 일본 내의 여론은 아직까지는 반러와 반공에 호응해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1차대전의 전후 공황으로 사회 문제들이 대두되며 대중의 시선은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국가주의자들의 행보에 대해서도 대중적 비판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18년(다이쇼7) 흑룡회와 낭인회는 국가주의에 비판적이었던 도쿄아사히신문의 사장 무라야마 료헤이를 습격하는
백홍사건을 저질렀는데, 이는 오히려 국가주의에 대한 반감만을 사는 역효과만을 샀다.
게다가 이런 식의 백색 테러에 대해 우치다 료헤이 등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고,
국가주의 단체 외부에서는 중앙공론의 요시노 사쿠조 등에 의해 무한히 씹히는 상태였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흑룡회는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흑룡회 해체 후 국가주의 운동은 노장회를 계승한 오카와 슈메이의 유존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많은 언론인과 대학생이 국가주의에 등 돌린 탓일까?
궁중모중대사건이 진정된 후 국가주의는 원동력을 점점 잃어갔다.
그나마 국가주의에 대한 호응도가 올라갔던 건 배일이민법 반대 시위였는데, 이건 반러반공이 아닌 반미라 효력이 좋지 못했다.
군축과 반서방 감정으로 물드는 다이쇼 일본
이전 글에서 다이쇼 덴노의 죽음까지 다루었다.사실 궁중모중대사건부터 다이쇼 시대의 끝까지 6년 밖에 되지 않고그 사이에 정말로 큰 정치적 사건이라고 한다면 관동대지진과 2차 호헌운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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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와 슈메이는 이런 현상을 타계하기 위한 지식인을 한명 초빙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며 사회주의와 국가주의를 합친 새로운 국가주의를 만들어간 지식인,
기타 데루지로, 아니 기타 잇키(北一輝)가 1921년(다이쇼10) 귀국했다.
기타의 귀국 이후에도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반러-반공이 가지고 있는 당시의 논리적 모순점이나 현실 문제에 대한 결여가 지적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색테러를 기반으로 한 과격주의적 성향은 포기하지 않아 반감만 살 뿐이었다.
1923년(다이쇼12) 소련의 외교관 아돌프 이오페가 시베리아 철군과 일소 국교를 위해 방일했는데,
이걸 가지고 유존사 내에 분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 간의 갈등이 발생했고,
유존사는 기타파와 오카와파로 분리되어가며 결국 해산했다.
기타의 행적은 전반적으로 당대 다른 국가주의자들보다 실천적이고 과격했던 느낌이 강하다.
다른 국가주의자들은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적을 부순다'는 느낌의 적색테러였다면,
기타 잇티와 그 일파의 적색테러는 '우리를 돕지 않는 모든 편은 적이며, 그런 적을 죽인다'는 느낌의 행적이 돋보였다.
게다가 비교적 현실주의적 대책이나 방안도 모색하던 다른 국가주의자와 달리
기타 잇키는 일종의 대혁명, 즉 러시아 혁명에 준하는 국가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걸 생각하면 기타 잇키는 정말로 '쇼와의 광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기타의 사상에 호응해준 것은 젊은 학생들, 특히 장교 준비생들이었다.
점차 장교들을 중심으로 기타 잇키와 교류하며 기타의 사상에 빠져들어갔고, 그 결과 육해군 모두에 과격주의적 성향이 입혀지나
이건 사실 4년은 더 이후의 일이다.
다이쇼 시대 기타 잇키와 국가주의의 행적은 이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쇼와로 넘어간 후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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