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일본의 사회주의 3
고토쿠 슈스이가 사회당에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내렸음은 점차 사회당이 아나키즘과 극단주의로 선회해갔음을 의미했다.이는 이러한 극단주의 노선을 거부했던 기독교 사회주의자(아베 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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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슈스이와 가타야마 센의 정치적 결별 이후
일본의 사회주의(기독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 아나키즘)는 뚜렷한 노선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는 일종의 공산 혁명을 위하여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행동론을 강조한 반면
사회주의자는 정치 참여와 의회 진출을 기반으로 하여 제도적 방향의 사회주의 실현을 주장했다.
즉 이 당시 공산주의자는 강경하고 이상주의적 방향성을 고집했고, 사회주의자는 현실적이고 온건한 방법을 추진했던 것인데,
이 두 방향성은 사실 상충되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이견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토쿠 대역 사건과 도라노몬 사건 등, 국체인 덴노헤이카를 공격하는 등의 행위는 향후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했을 때
상당한 위협이었기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다이쇼 연간을 거치며 자연스레 결별을 준비했다.
이러한 성향은 이후에도 이어졌고, 전후 일본공산당과 일본사회당(현 사회민주당) 간의 노선 차이는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한편 사회주의라 하더라도 현실적이고 온건한 정도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갈렸다.
그렇게 기독교 사회주의는 좌파사회주의, 중도사회주의, 우파사회주의로 갈리기 시작했다.
좌파사회주의는 비교적 정통 기독교 사회주의라고 볼 수 있겠고,
우파사회주의는 현실적 이유로 기업이나 타 정당과의 연계를 주장한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사이에서 중재를 맡은 인물들이 중도사회주의였고, 그래서 머릿수도 중도사회주의가 가장 적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자의 분화는 쇼와시대 내내 이어졌고,
전후 좌파사회당과 우파사회당으로의 분화, 일본사회당 재통합 이후 민주사회당(이후 민사당)의 분화 등으로 이어졌다.
지금이야 그렇게 중요한 주제는 아니겠지만 이러한 사상적 차이로 인해 일본공산당, 일본사회당, 민사당은
1980년대까지 절대로 손을 잡지 않았다. 아니 아예 작정하고 서로를 비난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심지어는 민본주의적 언론인까지도 다같이 손을 잡아야한다는 의견이 팽배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을 제대로 부숴버린 이가 있었으니, 바로 1920년대 초 공산주의를 이끌던 오스기 사카에였다.
오스기는 아나키즘과 급진적 노동주의를 강조했고, 일련의 타협주의적 시각에 대해 거칠게 비판했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기본으로 노동자와 밀착 관계를 강조하며 지식인들을 거칠게 비판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인은 요시노 사쿠조가 대표적이겠다.
이 시절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요시노에 대해 도피적이라며 일상적으로 비판했다.
오스기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일종의 내부 총질도 진행했는데,
특히 정치 참여를 추구하는 공산주의자(볼세비키파)에 대해서도 거칠게 비판했다.
청치 참여를 우너했던 볼셰비키파란 예를 들어 사카히 도시히코, 아라하타 간손 등으로, 이들은 공산주의자에게는 동지인 인물들이었다.
오스기는 아나키즘과 급진적 노동주의만이 이상이고 대안임을 강조했고, 그 외의 방안에 대해서는 비판조를 이어갔다.
(그래서 소련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오스기의 주장은 당연히 非아나키스트의 반발을 샀고, 그렇게 점차 좌익 진영 내에 이견이 발생했다.
이를 아나-볼 논쟁이라고 한다.
일본공산당과 무산정당 1
메이지 일본의 사회주의 3고토쿠 슈스이가 사회당에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내렸음은 점차 사회당이 아나키즘과 극단주의로 선회해갔음을 의미했다.이는 이러한 극단주의 노선을 거부했던 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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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수많은 대학생들이 졸업과 함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계열의 사회운동으로 편입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대학을 다니며 사회 문제를 고발하고 비판하던 낭독회나 연설회 출신들이었고,
그들에게 영향을 준 교육자(ex:가와카미 하지메)나 언론인(ex:이시바시 단잔) 역시 좌익 성향의 인물이 많았으며
사회 운동이라는 그들의 니즈를 채워 줄 곳 역시 좌익 진영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대학생들이 좌익 진영에 가입했고, 그 대표적인 게 위의 아소 히사시겠다.
1923년(다이쇼12) 사카이 도시히코가 체포되며 1차 공산당이 해산당하고 오스기가 살해당하면서
공산주의 활동은 다시 한 번 위기를 맞이했다.
이후 공산주의 세력은 1924년(다이쇼13) 후쿠다 도쿠조와 가와카미 하지메이 연구를 비판하며 등장한 신성
후쿠모토 가즈오가 주도하게 되었다.
당시 후쿠모토가 주도한 자본론에 대한 해석은 후쿠모토이즘이라는 사상적 변화를 이끌었고,
후쿠모토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25년(다이쇼14) 일본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뷰로 건설을 추진했다.
1926년(다이쇼15) 일본공산당(2차 공산당)은 그렇게 후쿠모토 가즈오와 아라하타 간손을 중심으로 재건되었다.
한편 사회주의 진영은 일본노동총동맹과 아베 이소오, 니시오 스에히로, 아소 히사시 등의 참여로
해산된 농민노동당의 재건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계열 인사에게도 손을 빌렸고, 1926년 노동농민당이 재건되었다.
하지만 노동농민당은 재건 직후부터 좌파사회주의, 중도사회주의, 우파사회주의 간 이견을 보였고,
얼마 안가 중도사회주의가 탈당해 일본노동당을, 우파사회주의가 탈당해 사회민중당을 결성해 분열했다.
손을 잡고 힘을 합쳐도 모자란 시대에 우선 자기들끼리 싸우는 흔한 일본 좌파의 양상은
이때부터 그 전통이 자리한 것이었다.
노농당 분열 이후 얼마 안가 다이쇼 덴노가 붕어했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쇼와 시대에서 하도록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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