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국가주의를 정치사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영향을 주었다.
낭인회, 흑룡회 등에서 활동하며 국체를 우선시했던 도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해외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국가주의적 사회 혁명을 꿈꾼 기타 잇키, 니시다 미쓰루
그리고 국학과 불교(일련종) 교리를 기반으로 덴노 중심의 국가주의를 주장한 다나카 지가쿠, 이노우에 닛쇼
이 중 가장 논리성이 좋았던 것은 세번째, 국학과 불교 교리를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한 국가주의였다.
다나카 지가쿠는 일련종 신자였고, 국학과 일련종이라는 일상적인 논지를 기반으로
국가주의에 대한 논리를 설파해 나갔다.
그의 영향은 거의 모든 국가주의 사상가에게 퍼졌고, 특히 일련종 승려였던 이노우에 닛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비교적 덜 주목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말년에 전쟁을 비판하고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말년인 1930년대 후반, 일본은 이미 광기에 잠식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광기를 주도했던 인물은 누구였을까?
우선 그 중 한 축은 기타 잇키였다.
다양한 사상을 결합하여 국가주의를 구성했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의 명망은 충분했고,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처럼 진보의 형태로 국가주의를 제시했기에 이상주의적인 면에서 매력이 충분했다.
다만 방법에 있어, 그리고 기타 잇키 본인의 활동에 있어 상당히 극단적임과 동시에 문제가 많았고,
천황기관설과 사회개혁론 등 국가주의의 본질과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가 섞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으로 국가주의를 형성해 감에 있어 기타 잇키의 영향은 뚜렷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론말고,
행동으로써 국가주의를 형성해 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도야카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오카와 슈메이?
제목은 기타 잇키지만, 또다른 광인과 기타 잇키를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 닛쇼는 법명이며 본명인 아키라(昭)를 파자한 것이다.
원래부터 승려인 것은 아니었고, 1909년(메이지42) 대학 졸업 직후 만주로 이동해 만철에서 첩보로 활동했다.
이후 형의 사고사로 인해 귀국했고, 귀국 후 당시 일련종에 불어닥친 근대 일련주의 사상에 빠져 일련종에 귀의했다.
다만 정식으로 출가한 것은 아니었어서 승적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다.
이러한 행적은 물론 그의 사상까지도 근대 일련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었고,
그 사상적 배경에는 다나카 지가쿠의 국학 중심의 사상이 있었다.
이노우에는 근대 일련주의의 실행적 국가주의, 즉 일살다생을 강조했고 그 결과 이노우에는 점차 테러리스트가 되어갔다.
비슷한 영향을 받은 인물인 니시다 미쓰기, 이시하라 간지 등도 비슷한 적극론을 주장한 걸 보면
당시 근대 일련주의는 덴노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라는 광기에 젖어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노우에 닛쇼의 행적과 기타 잇키의 행적을 비교하자면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적극 행동론의 이유겠다.
기타 잇키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느낌으로 협박과 공갈을 반복했다면
이노우에 닛쇼는 근대 일련주의의 일살다생이라는 사상적 기반으로 테러리즘을 자행했다.
그렇기에 이노우에의 천주는 반대세력을 제거한다는 신념이 드러나는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나중에 언급할 혈맹단 사건이 그러했다.
물론 이노우에 닛쇼 역시 기타 잇키가 그랬듯 당시의 젊은 장교들이나 국가주의자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기타의 사상이 군부에 이상 실현이라는 형식으로 전해졌다면,
이노우에의 사상은 적극적인 실천론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저 둘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군인들이 황도파가 되었고,
그 황도파가 자행한 행동 하나하나가 광기에 뒤삼켜진 시대에도 보다 더한 광기처럼 보인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과 적극적인 실천이 사상적으로는 훌륭하지 못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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