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狂人) 기타 잇키 1
다이쇼 초반기의 국가주의메이지 후반의 정치 분위기시간을 조금 돌려서 메이지 후반부의 정치 이야기를 해보겠다.1900년대 초반 일본의 정계는 네개의 파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겠다.하나는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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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잇키의 사상에는 굉장히 복합적이고 포용적인 성향이 함축되어있다.
1901년(메이지34) 기타가 고향에서 도쿄로 상경했을 때만해도 그는 고토쿠 슈스이, 사카이 도시히코와 교류하던 사회주의자였고,
이후 법학, 경제학, 정치학, 철학 등을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국가주의 단체인 흑룡회와 교류했으며,
몇년 후에는 흑룡회를 통해 중화민국의 인사들과 교류하더니 아예 중국으로 넘어가서 활동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쑹자오런, 쑨원 등 신해혁명의 주역들과 교류했고,
원래 '데루지로(輝次郞)'였던 이름을 중국식인 '잇키(一輝)'로 바꾼 것도 이때였다.
그 결과 기타 잇키가 일본으로 돌아올 즈음 그의 사상은 다양한 사상이 집약된 결과나 다름없었다.
헌정의 본의는 민의라는 자유주의와 민본주의의 사상도 포함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궁극적 형태로 사회주의적인 이상을 제시했으며,
그 목적 및 이상의 수단적 활용에 있어 국가를 위해야만 한다는 국가주의적 성향도 포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기타 잇키가 집필한 국가개조안원리대강(혹은 일본개조법안대강)이었다.
기타는 여기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민족사상의 개화'라는 같은 수단으로 인식했고
사회 개조를 위한 '일본 민족의 사회혁명'을 주장했다.
어쩌면 기타 잇키의 국가주의는 국가를 위함과 동시에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를 뒤집어 엎는다는 이중적인 방법론이 들어있던 것이었다.
기타 잇키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했고, 다양한 사상에 포용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당시 지식인으로서의 기타 잇키가 가지는 입지를 대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1918년(다이쇼7) 기타가 노장회에 들어가고 부터 1921년(다이쇼10) 기타가 상하이에서 귀국할 때까지
기타의 명망은 점차 높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류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위 사진의 니시다 미쓰기였다.
민본주의에 요시다 사쿠조가 있었다면, 국가주의에는 기타 잇키가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기타의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기타는 상당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그의 이상을 추구함에 있어, 그 실현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자 하였고,
그렇다보니 점차 과격해지고 극단적인 동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오카와 슈메이 등 유존사 단원들 중 일부는 기타의 행적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이기도 했고,
결국 그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야스다 공제 사건(야스다 공제 생명회사 내분 사건)이었다.
야스다 공제 생명회사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노조 측은 사측과의 협상을 위해 그 중재자로 기타 잇키를 섭외했다.
적어도 기타 잇키 정도의 지식인이라면 훌륭한 중재가 될 여지는 충분하다는 계산이었겠지만,
이는 끔찍한 오산이었다.
기타 잇키는 중재자로 참여한 후 야스다 공제 생명회사의 부사장으로부터 3000만엔의 뇌물을 받았고,
이 직후 기타는 중재를 포기, 자신을 섭외한 노조 측을 배신했다.
이에 대해 오카와는 기타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배신을 비난했고, 기타의 휘하에 있던 국가주의자 기요미즈 고지로 역시 기타와 결별을 택했다.
그렇게 기타파와 오카와파로 분열되어가던 국가주의는 정말로 완전한 노선 결별을 하게 되었다.
기타 잇키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는 야스다 공제 사건이 전부가 아니었다.
은행과 재벌을 위협하고 협박하여 국가를 위해 돈을 내놓으라고 했고,
이는 기타 잇키와 그 일파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에 있어 기타는 이상의 실현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라 여겼고,
이는 국가주의자의 시각에서도 비현실적이고 비도덕적이라 비판받았다.
관동대학살의 광기에 치를 떨었던 기타 잇키는 몇년 사이 같은 광기로 변질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일본 정부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고, 실제로 기타 잇키는 협박과 공갈죄로 감옥에 들어갔으나
1927년(쇼와2) 다이쇼 덴노의 장례식에 맞추어 특별사면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기타 잇키의 이상을 실현함에 있어 자금 등의 현실적 난관을 제외하고 가장 큰 벽은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덴노였다.
1920년대 천황기관설, 민본주의, 사회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국체유지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국체(國體), 즉 덴노 헤이카를 중심으로 쉽게 동요하지 않는 견고한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으로,
모든 일본인이 덴노 헤이카의 휘하에서 함부로 동요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힘쓰는 것을
일종의 '국민 도덕'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것이 기타 잇키의 국가주의를 정면에서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놀랍게도 기타 잇키는 천황기관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타 잇키는 자신의 사상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 개조 혁명에 있어
덴노는 그냥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니시다 미쓰기, 곤도 세이쿄 등과
니시다, 곤도 등과 교류하며 그들의 영향을 받던 젊은 장교들에게로 퍼져나갔다.
1930년대 초 본격적으로 형성될 황도파의 사상적 근원은 여기에 기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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