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고 가장 처음 쓴 역사에 대한 글이다.
메이지 유신에 대한 내 생각을 집약하는 것이기도 하며, 메이지 유신에 대한 중립적인 평가를 설명하는 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몇년전 우리 교수님은 메이지 유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셨다.
메이지 유신은 일종의 혁명이다.
유신(維新)이라는 단어의 뜻을 본다면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이라는 것인데(출처:네이버 사전)
오히려 이보다는 네이버 사전에서 설명하는 혁명의 뜻처럼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에 가깝다고 설명하는 게
메이지 유신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느껴진다.
그렇기에 과감히 '메이지 혁명'이라 표현해도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메이지 시대 전반에 걸쳐 일어난 변화들은 정말로 전통시대 일본의 모든 시스템을 갈아엎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룩한 성과이다.
막부와 정이대장군직이 폐지되었고 일본의 모든 군대는 덴노 휘하로 재편성되었다.
무사계급을 기반으로 한 군사제도는 폐지되고 그 대신 서양식 군제가 도입되었다.
장교 육성을 위한 육군대학과 해군대학이 설립되었다.
막부를 대신하기 위해 2관 8성제를 기반으로한 태정관제가 부활했으며, 태정관제는 제헌을 위해 이후 내각제로 대체되었다.
막부의 법과 무가제법도, 금중병공가제법도는 폐지되었고, 제헌과 함께 주요 역할은 대일본제국헌법으로 이전되었다.
상원인 귀족원과 하원인 중의원으로 구성된 제국의회가 수립되었고, 덴노의 자문역인 추밀원이 설치되었다.
황실과 정치가 분리되면서 궁내성이 신설되었다.
대일본제국헌법을 만들었으며 입헌주의에 기반한 정치제도가 도입되었다.
중의원 배출을 위해 총선거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학제가 개편되었으며 도쿄대학을 필두로 제국대학이 설립되었다.
근대식 법제를 기반으로 삼권분립이 형성되었다.
폐번치현과 판적봉환으로 번과 다이묘가 폐지되었으며 지방행정제도가 신설되었다.
토지 소유에 대한 개념을 개편했으며 근대식 조세제도를 도입했다.
태양력(그레고리력)과 미터법 등 주요 서양식 제도를 도입했다.
산업화를 위한 각종 회사가 설립되었으며 철도와 도로가 부설되어 교통-통신 면에서 개혁이 단행되었다.
산업혁명 후발주자 중 가장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룩해냈다.
불평등조약을 개정하여 무역과 외교면에서 서양 국가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서양식 제도와 용어를 일본식 한자어로 변용하여 동아시아에서 활용하게 했다.
의학, 생물학, 화학 등 각종 과학 분야의 연구에 있어 그 기반을 확고히 했다.
문학, 역사학, 철학, 법학 등 각종 인문학 분야의 연구에 있어 그 기반을 확고히 했다.
서양식 문화를 도입함과 동시에 노가쿠, 가부키 등 일본 전통문화에 대한 보호를 시작했다.
등등등
말 그대로 '근대화에 대한 정의'를 표현해주는 성과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조될 메이지 유신의 혁명적 성과는 이 세가지일 것이다.
유럽과 미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 열강으로 성장했다.
홋카이도, 오키나와, 오가사와라 제도를 영토로 확보했으며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렇다면 메이지 유신이 남긴 과제는 무엇일까?
우선 거대 자본의 잠식과 이와 관련된 정경유착이다.
입헌정우회의 설립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주요 기업인 미쓰이, 미쓰비시 등등은 정계와 직접적으로 유착된 상태였다.
애초에 미쓰비시 설립자인 야와사키 야타로가 해원대원이기도 했고,
이는 곧 사카모토 료마와 교류했던 주요 정치인 고토 쇼지로, 무츠 무네미츠, 이토 히로부미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노우에 가오루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뒷돈을 밝힌 걸로 유명하다.
그렇게 주요 정치인들로부터 받은 특혜는 거대 자본으로 하여금 일본 경제 구조에 광범위한 폐단을 만들었다.
비록 이 문제가 일본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었지만 서양 주요 국가와 달리 발전한지 얼마 안된 일본이었기에,
거대 자본이 무너질 경우 일본의 재정정책은 거대 자본을 위해 과도하게 사용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공황 때 이것이 실현된다.
다음으로 군부 및 정계의 파벌구도다.
군부 및 정계의 파벌은 유명한 것이다. 군부의 육해군, 조슈-사쓰마 구도를 말하는 것이며,
정계는 이토-야마가타-민당파의 구도이다.
군부 문제는 2차대전에 제대로 터지고 그렇게 되는 과정이 복잡해서 생략하겠다.
어느 시대나 리더 위주의 정치 구도는 있는 편이기에 이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지만
메이지 시대의 정치는 상당히 리더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입헌정우회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파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민당파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오쿠마 시게노부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노인네들이 죽거나 은퇴하면 새로운 리더가 나타났기에 부재에 대한 문제는 덜했지만
만약 그 새로운 리더의 능력이나 정치적 감각이 메이지 시대의 리더보다 떨어진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제국주의 확장에 있어 군부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확장됨이 당연하다는 걸 생각한다면 말이다.
세번째는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국가주의의 성장이다.
국가주의의 성장이 만드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이 국가주의가 입헌주의와 법치주의를 위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서, 국가를 위한 일, 애국지사의 행동이라고 하여 처벌을 면하거나 약한 처벌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겐요샤의 등장 이후 일본에는 도야마 미쓰루 등등 국가주의 인사들이 흑룡회, 낭인회 등의 국가주의 단체를 설립해 활동했다.
이러한 단체는 근본적으로 자유민권운동으로 탄생한 정치단체인 겐요샤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존황양이와 자유민권론을 잇는 정치활동처럼 나타났다.
이는 일본에 만행했던 천주와 결합했고 그 예시가 오쿠마 시게노부 암살 시도 사건이다.
국가주의는 군인의 충성을 유도하기 위해 군부에 적용되기도 했으며,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 중 하나가 노기의 할복이다.
군사력의 성장은 곧 국가의 성장이고, 전쟁의 승리를 덴노에게 바치는 것이 곧 군대의 목표가 되어가면서
군대가 곧 애국의 집단이고, 국가주의를 위해 군사력 강화만을 강조하는 행태가 나올 여지가 충분했다.
애초에 마쓰카타 마사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러한 성향을 보였고, 그렇기에 메이지시대에도 국가주의적 면모가 뚜렷히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문명국'이라는 의식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극동 유일의 문명국'이라 칭했다.
속된 말로 국뽕이다. 그리고 그 국뽕의 근거로 천황제, 산업화, 일본 문화 등을 제시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에 집착하는 것이다.
여론이 실리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문명국 일본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온갖 희생에 동조했고
반대로 특정 이익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과격하게 실패라고 취급해 거칠게 항의했다.
메이지시대에 이미 그 예시가 등장했으며,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히비야 방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여론이 국가주의에 편승해버렸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결말이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세번째와 네번째를 원인에 집중하여 요약하자면
'정치사상이라는 원칙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본에 정치사상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오쿠마 시게노부, 후쿠자와 유키치, 나카에 조민, 요시노 사쿠조 등 훌륭한 정치사상가는 분명 존재했다.
그 외에도 비록 일본의 몰락에 기여한 사상이지만 도야마 미쓰루 등도 있었다.
문제는 주요 정치사상가들의 의견이 원칙으로 활용되지 못한 것이었다.
주요 정치적 변혁에 있어 실리나 원칙보다는 여론에 편승하는 식의 변화가 이루어졌고
그 어떠한 원칙도 존재하지 못했기에, 막말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정국이 나타나기도 했다.
애초에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처럼 몇백년에 걸쳐 형성된 공감요소 없이 정치제도면에서 몇십년 간 도입된 것이었기에
제도와 산업의 발전과 달리 민중의식이나 사상은 아직 충분한 성장에 이르지 못했다고 볼 여지가 컸다.
그 결말은 간단하다.
윗 글에서 언급한 메이지 유신을 해석함에 있어 두번째 장벽
'메이지 유신의 성과로 이룩한 참사'이다.
메이지 유신의 과제를 논하면서 너무 완벽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비판적으로 과제를 적은 이유도
바로 그 결말이 두 번의 원자폭탄 폭격과 2차대전 패배이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은 위대한 혁명이고 뚜렷한 성과를 이룩해냈다.
하지만 분명 과제는 존재했다. 위대한 혁명에도 무언가 결여되어 있던 점이, 위대하지 못한 점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뒤이은 시대인 다이쇼, 쇼와의 임무였고, 발전은 있었지만 결국 결말로 이어졌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함에 있어 그 성과와 공은 메이지시대로 충분할 수도 있겠지만
향후 해결할 과제와 문제점, 그리고 그 여파를 논함에 있어 다이쇼와 쇼와 33년간도 메이지 45년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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