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조금 돌려서 메이지 후반부의 정치 이야기를 해보겠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의 정계는 네개의 파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하나는 초연주의 번벌파.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사이고 주도, 마쓰카타 마사요시 등의 막말기 번사들이 주도한 파벌이다.
당시 일본정계에서 가장 발언권이 높았던 파벌이며,
추밀원, 귀족원, 육해군을 장악해 정치적 영향력 역시 가장 뚜렷했다.
이들을 직접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같은 번벌파뿐이었다.
정당활동을 극혐했으며, 자유민권운동 자체를 혐오했다.
입헌정우회의 탄생
1898년(메이지31) 11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총리에 내정되면서 2차 야마가타 내각이 출범했다.내각 내에는 번벌파가 꽉꽉 들이찼으며, 야마가타답게 주요 안건들은 전반적으로 통과되었다.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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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입헌정우회이다. 번벌파를 견제할 수 있는 건 번벌파였기에 나온 작품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번벌파, 관료, 민당파, 재벌을 연결시켜 만든 일종의 빅텐트 정당이다.
물론 정치적 영향력은 엄청났고, 민당파와 번벌파의 중개자 위치에서 활동했다.
정확히 말하면 필요에 따라 번벌파와 결탁하거나 민당파와 결탁하면서 정치적 실리는 제대로 챙겼다.
이럴 걸 알고 야마가타가 이토를 열심히도 견제했으나
오히려 입헌정우회가 관료 출신 하라 다카시 및 구 자유당계 마쓰다 마사히사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정우회의 당세만 확장되었다.
세번째는 민당파(민권파)이다.
헌정본당은 오쿠마 시게노부의 정계은퇴로 당세가 축소되었고,
자유당계는 정우회로 들어가버렸으며,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정계 은퇴와 고토 쇼지로의 죽음으로 정치적 구심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오자키 유키오, 이누카이 츠요시,와키쓰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등 인물이 없던 아니었지만
저 시절에는 전부 하라 다카시 선에서 정리되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오쿠마 시게노부가 정계에 복귀하기 전인 메이지 말~다이쇼 초반에는 민당파의 존재감은 상당히 희미하다.
선거는 정우회에게 밀렸고, 그러니 번벌파와 정우회가 정계를 양분하는 정국에서 한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뭐 말할 게 없다.
마지막으로 국수주의자와 사회주의자였다.
이 당시에는 아직 자유민권운동의 하위 개념이었지만, 뚜렷하게 구분할 여지는 충분했다.
국수주의의 경우 자유민권운동의 정치 단체인 겐요샤(玄洋社)를 기반으로 하며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 확장되며 단체들도 추가적으로 등장했다. 낭인회니 흑룡회니 그런 것 말이다.
사회주의의 역시 자유민권운동의 하위 개념으로 시작해 이후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국수주의는 기타 잇키의 본격적인 등장 이전에는 언급할 요소가 적은 편인 반면,
메이지 후반부를 설명함에 있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 살피고 가야한다.
비록 숫자는 분명한 소수였지만, 언급해야 할 사건 및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수주의와 초연주의가 만연한 메이지 시대 정치에 있어 그들의 활동은 특색이 분명하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를 거의 다 다루었는데, 일본 사회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한일합방, 조약개정, 메이지 덴노의 붕어로 이제 메이지를 끝마쳐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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