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노가 바뀌면 뭐가 있다. 이게 현인신 반신반인의 위업인가?
헤이세이 시대의 아키히토 덴노가 양위하고 레이와 시대의 나루히토 덴노가 즉위했고,
즉위식 후 며칠이 지나자 우한에서 코로나 19가 시작되었다.
쇼와 덴노가 훙하고 헤이세이 시대의 아키히토 덴노가 즉위하자 버블경제가 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이쇼 덴노가 훙하고 쇼와 덴노가 즉위하자
즉위식도 전에 대공황이 터져버렸다.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대공황을 빨리 맞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대공황에서 먼저 탈출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 과정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험난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 독일 제외.
대공황이 시작된 것은 1926년(다이쇼15) 중순이었다.
다만 저 당시에는 다이쇼 덴노가 생사를 오가는 게 더 큰 이슈였고,
1차대전의 전후공황과 관동대지진의 여파 정도로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해서 일본 경제의 고질병이 인식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일본의 주요 기업은 만들어진지 길어야 60년된 신생기업들이었고,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편법과 혜택을 받은 결과물들이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내수시장에 모든 걸 건 결과물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관동대지진 피해는 정말로 심각했다.
1923년(다이쇼12) 9월 1일 일본 기업은 생산시설, 노동자, 소비자를 모두 잃는 피해를 입었고,
여기서 회복하기 위한 일본의 재정정책은 상당히 적극적이었고 과도했다.
기업 지원을 위한 재정정책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지진어음의 만기인 1926년 9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일본 정부는 이 어음에 대한 기한을 연장시켜줬고,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버틸만한 위기라고 판단했다.
다만 틀렸을 뿐.
1927년(쇼와1) 3월 예산위원회에 출석한 1차 와카츠키 내각의 대장대신 가타오카 나오하루는
정부의 재정정책에 대한 질의를 받고 있었고, 여기서 실수로 기밀 중의 기밀을 유출해버렸다.
도쿄와타나베 은행이 끝내 파산했습니다.
이게 기밀인 이유는 간단했는데, 메이지 시대에 중소은행이 정리된 이후 일본에 은행 파산은 없었고,
그 과정에서 은행이나 법인 간 거미줄처럼 유착되어 있어 하나라도 갑자기 망하면 그 피해는 겉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발언 직후 도쿄와타나베은행에 뱅크런이 발생했다. 그렇게 도쿄와타나베은행은 정말로 망해버렸다.
저 발언이 있고 다음 날인 3월 15일 도쿄와타나베은행의 주요 거래처들은 자금 문제로 하나둘 파산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그 중에 스즈키상점도 있었던 것이었다.
참고로 당시 스즈키상점은 미쓰이, 미쓰비시와 함께 일본 3대 대기업 중 하나였고,
일부 계열사는 분리독립하여 겨우 생존해냈지만, 그 중심에 있는 스즈키 상점은 파산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거대 자본이 무너졌고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자로 전락해야했다.
스즈키 상점의 도산은 사실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선술했듯 일본의 주요 대기업들은 일본 정계와 유착하여 온갖 편법과 수혜를 이용해왔고
그 과정에서 정책으로부터의 특혜나 정부 기관으로부터의 부당한 이익 역시 취해오던 상태였다.
대표적으로 스즈키 상점의 경우, 일본 정부의 목적에 의해 세워진 대만은행으로부터 대규모의 부정 대출을 받은 상태였고
이를 기반으로 돈을 굴려나가던 중 파산한 것이었다.
(이 스즈키 상점은 지금의 스즈키사와는 완전히 다른 회사임)
즉 1927년 3월 스즈키 상점의 도산과 동시에 대만은행이 파산했다.
그 과정에서 대만은행이 스즈키 상점에 부정대출해줬음이 드러났고, 이제 대공황은 본토를 넘어 식민지까지 삼켜나갔다.
와카츠키 내각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대규모의 긴급대출안을 제시했고, 이를 포하한 예산을 제안했으나
이게 정권 획득의 계기가 될 수 있었기에 입헌정우회는 내각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입헌정우회는 호헌 3파 구도의 붕괴 이후 입헌민정당의 내각에 상당히 비협조적으로 행동했다.
게다가 다나카 기이치가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제치고 총재에 당선된 후부터 국가주의적 성향을 탑재해갔기에
입헌정우회의 성향에선 입헌민정당의 정책은 전반적으로 반감을 살 여지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가 주도한 대중 협조 외교의 경우
관동군과 육군의 반발을 크게 샀는데, 마침 다나카 기이치가 육군 출신이었다.
(얼마 안되는 非야마가타파 조슈 육군이었음)
1차 와카츠키 내각도 이러한 정우회의 행보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따라서 일단 추밀원에 현실적인 설득을 한 후 긴급대출안을 포함한 예산안을 통과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추밀원에는 사이온지 긴모치만 있던 게 아니었고
기요우라 게이고나 히라누마 기이치로와 같은 완강한 보수파도 엄연히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러한 인물들이 1차 와카츠키 내각의 정책에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
결국 긴급대출안과 예산안은 통과되지 못했고, 결국 1차 와카츠키 내각은 붕괴하게 되었다.
이후 차기 내각총리대신에는 입헌정우회 총재인 다나카 기이치가 내정되었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조각 직후 모라토리엄을 선포했고, 와카츠키 내각이 제시한 예산안과 똑같은 내용의 예산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바로 통과되었다. 즉 애초에 긴급대출안과 예산안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었다.
경제는 박살나고 있었지만 일단 국가가 주도적으로 행동하며 피해가 급속도로 확대되는 건 막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이건 미봉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본 경제가 파탄나는 건 일단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한 것이었다.
이 이후 다나카 기이치 내각총리대신은 정말로 하고 싶은 걸 다했다.
그 하고 싶은 게 뭐였느냐? 애초에 다나카 기이치부터가 육군 출신이니 추측은 가능할 것이다.
이후 다나카 기이치의 대외정책에 대한 평가는 이견이 갈리지만,
어쨌든 다이쇼 말경의 다양한 정치적 논의와 완전히 반대로 가는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광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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