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내전
장쭤린(張作霖)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성장한 동북지방 마적단의 우두머리로신해혁명 전후로 위안스카이파에 붙으며 위안스카이의 군사적 기반이자 충신으로 활동했다.위안스카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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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상당히 간략하고 줄거리만 논하듯 디테일을 생략했는데, 내가 쓰고 싶은 건 일본사지 중국사가 아니라 그렇다.
저 시대에 중국 정세는 월 단위로 바뀐다.
뜬금 없는 사람(ex: 돤치루이)이 다양한 이유로 재집권하고 실각하기를 반복했는데,
월 단위로 체크하는 건 일본사로도 솔직히 머리가 아프다.
중요한 건 위안스카이 사후 분열된 중국이 결과적으로 국민정부의 장제스와 봉천군벌의 장쭤린의 양강 구도로 이어졌다는 것이겠다.
물론 저 둘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장제스에게 협력, 혹은 독자세력으로 정착한 군벌들이 별의 별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걔네 다 합쳐도 장제스나 장쭤린에게 못 비볐다.
여기에 더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이끌던 중국공산당이 있기는 한데, 이거 언급하면 진짜 중국사가 된다.
1차 국공합작도 이러한 이유로 언급을 안했다. 왕징웨이나 서산회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반봉사건과 미쓰야 협정으로 장쭤린과 봉천군벌이 일본의 앞잡이임은 이제 온 중국에 알려졌다.
따라서 외세의 힘을 빌린 봉천군벌에 비해 광저우의 국민정부는 점차 명분적으로 우선되기 시작했고,
여기에 더해 쑨원 사후 장제스가 집권하면서 장제스 중심의 강력한 체제가 구성되며
장제스는 대륙을 지배할 군사적 여력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1926년(다이쇼15) 7월, 장제스는 1차 북벌을 시작했다.
두달 간의 공격으로 장제스는 우한의 우페이푸와 난창의 쑨촨팡을 격파했고,
1927년(쇼와2) 1월에는 난징과 상하이를 향해 진격했다.
3월 말 난징과 상하이는 국민정부의 손에 떨어졌고, 신해혁명 이후 16년만에 중국국민당은 그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南은 장제스가, 北은 장쭤린이 지배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1927년 3월 말, 난징이 국민정부에 손에 떨어진지 얼마 안되어 국민정부군은 난징의 외국인 거류지에서 폭력사태를 일으켰고,
이어 4월 12일 상하이에서 反장제스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장제스는 잠시 실각하게 되었다.
이때 국민정부는 난징 국민정부와 우한 국민정부로 분열되었고
그 과정에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원수지간이 되었으며, 1차 국공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나카 기이치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장제스가 물러난 지 얼마 안되어 일본의 함대가 산동반도로 출병했고(1차 산둥 출병)
아예 이참에 화북에 대해 영향력을 가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제네바에서 열린 군축회담이 결렬되자 이 참에 협조외교노선을 폐기하고
대중국 적극론을 외교의 기본 방침으로 설정해 나갔다.
1차 산둥 출병이 있고 얼마 안되어 동방회의가 개최되었고,
중국과 만주-내몽골(만몽)을 분리하며 만몽을 일본의 우지하기 위한 강경 외교를 기본 방침으로 하며
필요할 시 군사적 개입도 불사한다는 것을 일본 정부의 기본 원칙으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본의 강경한 태도에 당연히 국민정부는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反국민정부 세력이자 1차 북벌 이후 후퇴한 군벌들이 장쭤린을 중화민국 대원수로 추대했기에,
이제 중원과 화북까지 장쭤린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며 세력 균형이 붕괴될 위기에 처해진 것이었다.
한편 국민정부에서 하야한 장제스는 세계여행을 빌미로 해외에 나가있었는데
그 첫 목적지는 일본이었다.
1927년 11월 장제스는 다나카 기이치 내각총리대신을 만났고, 중일관계와 향후 상호 간의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비밀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 직후 다나카 기이치는 신이 났는지, '장제스가 장강 이남의 지배만을 약속했다'고 발표했다.
회담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기에 정말로 장제스가 강남에 한정되는 식으로 일본에 약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단 이 회담으로 산동의 일본군은 철군했고,
이후의 분석으로 중일전쟁은 장제스-다나카 회담에 대한 불이행의 결과라는 의견도 있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장제스가 이를 격렬히 부정하고 있기에 진위가 상당히 불분명하다.
화북이 장쭤린을 중심으로 개편되며 결국 난징과 우한으로 분리된 국민정부는 힘을 합쳐야만 했다.
그리고 이 즈음 일본에 있던 장제스가 귀국하였고 통일된 국민정부는 1928년(쇼와3) 장제스를 복귀시켰다.
장제스-다나카 회담으로 일단 일본 방면의 건이 진정되었다 판단한 것인지,
장제스는 1928년 4월 북벌을 재개했다.(2차 북벌)
이제 중국 대륙에는 온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장제스와 장쭤린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한편 일본의 강경 외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소극적인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관동군과 만철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육군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내에 없었기에 비교적 자율성이 강했고,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노우에 잇쇼 등의 영향을 받아 국가주의적 성향을 키워나갔고,
그렇기에 이들의 이상주의적 시각에서는 미개하고 후진적인 중국은 쉽게 지배가 가능한 것이며
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덴노헤이카에게 바쳐 일본과 황실의 이름을 드높혀야 한다는 것이 자리했다.
그들의 이상주의적 시각에서 어려운 것이 아님에도 난관을 겪고 있는 것은
원래대로라면 내각이나 장제스를 향해야 했겠지만 점차 그 현실적 이유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대일본제국이 중국 공격을 망설이는 가장 큰 원인이자 중국 공격에 있어 가장 큰 장벽이 무엇인가?
관동군의 장교들은 결국 이러한 결론을 낸 듯하다.
장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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