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를 논함에 있어 이를 정면에 도전할 수 있는 훌륭한 논제가 하나 있다.
헌정은 민중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운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당장의 문제점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자.
그렇다면 이 명제에서 조선과 대만은 어떻게 해당되는가?
1927년(쇼와2) 조선인 이북만은 프롤레타리아 예술에 자신의 글을 투고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민지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일본인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물론 이북만은 공산주의자였다. 그렇지만 나는 이 문장만큼 당시 일본인의 식민지 인식을 표현해주는 게 없다고 느꼈다.
조선과 대만의 통치, 그리고 1차대전 이후 남양군도에 대한 통치까지
제국주의 일본의 확장은 나름 순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재야인사들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있으니 바로 3.1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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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동아시아 정세의 안정과 평화, 동아시아에 문명개화를 가르친다는 선구자적 위치를 기반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3.1 운동으로 이 정당화는 무의미함이 드러났고,
동시에 문명개화를 기반으로 성장한 일본의 사회정치적 의식에 있어 식민지의 존재 자체가 배격되는 것이기도 했다.
원래 일본의 지식인들은 일본 내의 문제점 해결에 초첨을 맞추곤 했다.
이는 재야인사와 유력 정치인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이었다.
미우라 데쓰타로가 확장주의를 포기하고 내치에 집중하자는 소일본주의를 주장한 것도,
이시바시 단잔이 아예 식민지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며 소일본주의를 강화한 것도,
기본적으로 일본과 일본인을 위한 것이 전제되었던 것이었고 식민지민의 현실과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 선구자적 행적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요시노 사쿠조였다.
1916년(다이쇼5) 요시노 사쿠조는 조선과 중국을 여행하며 그 지역의 동향을 관찰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조선인과 교류하며 조선의 상황을 살핀 요시노는
3.1 운동과 5.4 운동에 대해 공감을 표했고, 일본에게 탄압받던 조선인과 중국인을 구명하려 하기도 했다.
1916년부터 1921년(다이쇼10)까지 요시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조선과 중국의 반일감정이었고,
다양한 조사와 증언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과 대만의 식민통치에 관심을 가진 결과 중앙공론에
조선과 일본 간 교류를 늘려야 하며, 조선과 대만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한 식민통치를 진행해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면을 본다면 요시노 사쿠조가 설정한 민본주의의 정의 안에는
일본인 뿐 아니라 조선인과 대만인도 포함되어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낭인회와의 입회연설회에서 알 수 있듯, 요시노는 국체의 수호를 부정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제국주의와 민본주의 간의 중재와 조화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요시노 사쿠조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니 국체의 수호를 부정한 사상적 기틀을 제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요시노 사쿠조는 사회주의자와 교류한 것이지 사회주의자의 색채가 짙은 인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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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이라면, 어쨌든 요시노 사쿠조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조선과 대만을 배척하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조선과 대만을 호적법으로 분류하여 이에 따른 차등대우를 했던 당시의 상황은
어쩌면 요시노의 시각에서는 문제점이라 지적될 수 있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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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 글에서 메이지 유신의 문제점으로 사상적 결여를 제시했다.
이 글뿐 아니라 다른 글에서도 줄곧 언급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요시노 사쿠조를 중심으로 한 민본주의론은 결국 근대 일본에 사상적 기틀로 자리잡지 못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다.
왜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론은 사상적 기틀로 자리잡지 못했는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논지를 제시하고 싶다.
1. 사상 자체가 국가주의와 사회주의 양측으로부터 타협한 경향이 있어 극단주의에 취약했다
2. 쌀 소동 이후 일본의 정세는 사상적 논의를 하기에는 여유가 없었고, 관동대지진에서 회복한 직후 바로 대공황이 닥쳐왔다
3. 보통선거제도 실시 후 재야인사의 활동을 보면 민본주의론자보다는 사회주의자와 국가주의자의 행적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4. 민본주의론이 舊민당파-입헌민정당으로부터 호응 받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민본주의론은 실패했다고 봐야겠다.
요시노 사쿠조와 민본주의는 근대 일본의 실패를 분석하며 재조명된 것으로, 특히 한국에서 주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시노의 사상은 근본적인 변화나 현실적인 대안 모두 만들어내지 못했고
관동대지진과 대공황의 혼란 속 정신차리니 일본은 국가주의의 광기에 뒤덮힌 후였다.
즉,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요시노 사쿠조 등을 필두로 한 사상적 논의가 진행될 수 있었던 시기에 일본은 그럴 여유를 잃었고
그러는 사이 일본은 대동아문명으로의 원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렇기에 요시노 사쿠조가 사후 재조명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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