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노 사쿠조가 민본주의를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로 채택하고, 입헌주의의 기본 조건으로 민본주의를 제시했을 당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 민본주의에 호응해 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아닌 '민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도 있지만 이 부분은 생략함)
예를 들어 다이쇼를 대표하는 논객 중 한명인 가야하라 가잔의 경우
'데모크라시를 나누어 사용하는 요시노 박사'라며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론을 비판했다.
하지만 당시 요시노 사쿠조가 주장한 민본주의는 언론과 선거권의 확대를 기반으로 한 현실적인 대안의 제시를 목표로 했고,
이를 통해 초연주의 특권계급에 대한 비판이자 사회적 자유의 실현을 통한 민권의 발달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연호가 메이지에서 다이쇼로 바뀌는 1910년대 초반은 일본에 사상적 대안이 다양하게 제시되던 시기였다.
그들의 주장은 큰 틀에서는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와 비슷했으나 현실적인 대안을 어디에 중점을 두었느냐에 따라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가야하라 가잔은 민당파와 교류하며 당시 민당파와 많은 부분을 공유했는데,
초연주의를 비판하고 일본의 정당정치에 결여되어있는 점을 강조하며 당시 일본의 정치제도를 주로 비판했다.
이 부분은 당시 가야하라의 잡지 '제3제국'에 논객으로 참여했던, 당대를 대표하는 민당파의 수장
오자키 유키오나 이누카이 츠요시가 주장한 바와 많은 것이 유사했다.
(그래서 그런지 가야하라의 휘하에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배출되었다.)
미우라 데쓰타로는 당시 일본의 정치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정치 참여의 확대를 강조했다.
심지어는 이를 넘어, 당시 일본에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함을 주장했고,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의 팽창주의를 비판하고 내치의 개선을 주장하는 '소일본주의'를 1913년(다이쇼2) 주장했다.
실제로 미우라 데쓰타로를 대표하는 저서의 제목이 '대일본주의인가 소일본주의인가'이다.
심지어는 민본주의에 대한 비판론으로 천황기관설이 제기되었다.
헌법학자인 우에스기 신키치와 미노베 다쓰키치가 주장한 것으로, 양측의 의견은 꽤 차이가 있었지만,
우에스기는 민본주의를 '덴노에 의한 통치를 배척하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미노베는 '국가는 헌법상 인격을 가지고, 법인으로서의 국가가 주권의 주체가 되며, 덴노는 국가의 최고 기관이 된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우에스기와 미노베는 이거 가지고 열심히 논쟁을 하던 사이였지만, 이 둘의 주장 모두 민권주의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있었다.
이때는 몰랐겠지. 천황기관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를...
이러한 민본주의에 대한 의견이 교환되던 가운데 그 선봉 역할을 맡은 건, 그 중 가장 래디컬 성향의 언론이었던 동양경제신문,
그리고 그 주필이었던 이시바시 단잔이었다.
이시바시는 심지어 기존 사상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했고, 보통선거제도의 도입을 강조했으며,
심지어 필요하다면 식민지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봐도 미친 것 같은데, 솔직히 젊어서(당시 30대 초반)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정도는 되어야 자기가 나온 와세다 대학의 창립자인 오쿠마 시게노부의 1차대전 참전을 비판할 깡이 되나 싶기도 하다.
이래서일까? 이시바시 단잔은 전후인 1956년(쇼와31) 자유민주당의 총재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의견 교류와 주장이 어우러지고 있는데, 민본주의가 본격화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1914년(다이쇼3)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일본은 거기에 참전했으며,
애초에 이 시절에 초연주의의 대장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정치적 권위가 언터쳐블이었다.
덴노도 무시하던 사람이 언론인이나 학자따위가 눈에 보였겠는가?
메이지 일본의 사회주의 3
고토쿠 슈스이가 사회당에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내렸음은 점차 사회당이 아나키즘과 극단주의로 선회해갔음을 의미했다.이는 이러한 극단주의 노선을 거부했던 기독교 사회주의자(아베 이소
mtw31082.tistory.com
한편 사회주의는 이 당시, 즉 고토쿠 슈스이의 대역사건 이후 일종의 암흑기(겨울 시대)를 겪고 있었다.
정치나 사회 운동보다는 빈민 구제 등의 형태로 전환되었고,
심지어 당시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던 사카이 도시히코는 '가능하면 사회주의자는 본성을 숨겨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정치판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숫자와 여력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고,
그렇기에 일종의 반체제적 성향을 공유하던 민본주의자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어쩌면 민본주의의 시작인 요시노 사쿠조가 사회주의자와 교류했던 부분이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고,
사회주의의 입지 상 당시에는 사회주의를 일정 수준 포기해야만 했던 정황에 의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자들의 정치 활동은 민본주의자들과의 교류와 지원에 기반을 두기도 했고,
그렇게 1915년(다이쇼4)을 전후로 하여 민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렇다 하여 무언가 뚜렷한 성과와 발전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민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직은 초연주의 번벌파와 자유주의 민당파와 비교하면 존재감이 적었다.
그런데 1차대전으로 일본의 대내적 상황이 변화하고, 2차 오쿠마 내각이 붕괴하고 데라우치 내각이 설립되면서
공교롭게도 민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한 지식인들의 입지가 좋아지게 되었다.
1916년(다이쇼5) 9월부터 가와카미 하지메는 오사카아사히신문에 '빈곤이야기'를 연재했다.
가와카미는 빈곤을 '상대적 빈곤', '피구휼자로서의 빈곤', '육체의 건강한 유지가 곤란한 빈곤'으로 구분하고,
세번째 빈곤인 '육체의 건강한 유지가 곤란한 빈곤'에 집중하여 식생활의 '빈곤선'을 규정해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 현상을 일본 사회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이러한 가와카미의 지적이 인정받듯, 당시 일본의 곡물 부족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확대되고 있었고,
여기에 더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총리대신이 시베리아 파병을 결정하면서 결국 사단이 나고 만다.
데라우치 내각의 실책
오쿠마 시게노부의 내각과 1차대전이토가 죽고 연호가 바뀌며 정국은 전반적으로 야마가타파의 입맛에 맞추어 변화해갔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야마가타파에서도 대안이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mtw31082.tistory.com
1918년(다이쇼7) 쌀 소동이 전국적인 무장 소요로 확대되었고,
결국 초연주의자들도 현실적인 요구에 호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같은 해 결국 데라우치 내각이 사임하고 하라 내각이 출범했으며, 1920년(다이쇼9)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드디어 물러나게 되었다.
(궁중모중대사건)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이제 민당파와 재야 인사들이 요구하던
정치 구조와 제도의 변혁을 기대할 여지를 만들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실현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말이다.
'일본 근현대사 > 다이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본주의, 사회주의, 요시노 사쿠조 4 (0) | 2025.03.25 |
---|---|
민본주의, 사회주의, 요시노 사쿠조 2 (0) | 2025.03.24 |
민본주의, 사회주의, 요시노 사쿠조 1 (0) | 2025.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