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말하는 수도는 개념 그대로의 수도와 정치적 중심지를 모두 뜻한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여러 왕조가 난립한 적이 없어 단순히 수도만 따지면 적을 게 상당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성곽 등의 방어시설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남아있는 경우만 서술한다.
이유는 여기로
교토와 나라에는 성곽이 있을까
전통시대에 수도라 함은 성곽과 궁궐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가 돋보인다.서울의 경우 한양도성과 5대궁,개성 역시도 개성부가 외성과 나성으로 둘러쌓여 있고 그 안에 만월대가 있었다.중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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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시대 이전은 역사적으로 불분명한 점이 있어 생략한다.
아스카쿄-현 나라현 아스카무라(592~676)
'아스카시대'의 그 아스카이다.
쇼토쿠 태자가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곳이기도 하며, 일본 고대 사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을사의 변 이후 수도로의 역할은 거의 퇴색되었으며, 주기적으로 다른 곳으로 천도하다 아스카쿄로 돌아다는 식의 행적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592년부터 676년까지의 기간 중 밑의 기간과 겹치는 시대에는 수도 역할을 안했다고 보면 된다.
아스카 내에도 여러 궁이 있다. 왜궁, 강본궁 등등. 그런데 이는 일단 아스카쿄로 통칭하고자 한다.
일본서기 언제 읽어...
참고로 아스카시대의 아스카는 飛鳥인데, 아스카무라의 아스카는 明日香이다. 시대가 흐르며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나니와쿄-현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일대(645~654)
구글지도에서 오사카성 밑을 보면 나오는 나니와궁이 바로 이 나니와쿄의 궁전 자리이다.
진신의 난 이후 즉위한 고토쿠 덴노는 소가씨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등의 정치적 이유로 나니와쿄로 천도했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다이카 개신이라는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고토쿠 덴노 시대에 권력의 한 축이었던 나카노오에 황자(후일 덴지 덴노)와 사이가 멀어졌고,
결국 고토쿠 덴노에 의해 아스카쿄로 환도하기도 했다.
얼마 안가 고토쿠 덴노가 병상에 눕자 나카노오에 황자가 황실의 모든 인사를 데리고 나니와쿄로 이동했으며,
고토쿠 덴노 사후 아스카쿄의 궁전을 확장하면서 나니와쿄는 수도로의 역할을 상실했다.
여러차례 불이 났고, 그 결과 일본은 복구자체를 포기하고 잊혀졌다가, NHK 건물을 짓던 과정에서 나니와궁의 터가 발견되었으며,
오사카역사박물관과 NHK 오사카국에서 나니와궁의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간사이 역사여행 1일차 오사카
오사카성에 도착했지만 몸상태가 박살 난 건 그대로였다.피곤하고 졸리고, 잠을 못 자니 몸이 무거웠으며 흡연장 찾는다고 좀 무지성으로 걸어서 다리도 아팠다.돌고 돌아 흡연장이 있는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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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쿄-현 시가현 오쓰시 일(667~672)
비와호수 왼편의 평지에 지어진 수도로 덴지 덴노에 의해 지어져 덴지 덴노 치기에 사용된 수도이다.
이곳을 수도로 쓴 데에는 백촌강전투의 패배로 아스카쿄에 소가씨 세력이 재흥했다는 설이 있는데
자세하게는 안 찾아봐서 모르겠다.
덴지 덴노의 시대에는 수도로 아스카를 완전히 대체했으나 덴지 덴노 사후 진신의 난이 일어나 불에 탔다.
진신의 난으로 즉위한 덴무 덴노가 아스카쿄로 돌아가면서 그대로 버려졌고 지금도 터만 겨우 남아있다.
후지와라쿄-현 나라현 가시하라시 일대(676~710)
일본서기 덴무 5년 기사와 덴무 11년 3월 기사에 나오는 '신성(新城)'으로
막상 천도 계획을 만든 덴무 덴노 시대에는 공사 시작도 안했다가 지토 덴노 때에 완공되었다.
아스카보다는 북쪽에 있다보니 헤이안쿄 천도를 앞두고 사용되었으며,
당의 장안을 본 떠 주작대로 등의 교과서에 나올 법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헤이조쿄-현 나라현 나라시 일대(710~794)
사슴 공원이 있는 그 나라이다. 당시에는 헤이조쿄(平城京)이라 불렀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마지막 덴노인 지토 덴노 시기에 계획되었으며, 이를 위해 후지와라쿄로 임시 천도한 것이기도 했다.
당나라의 장안을 모방한 양식으로 유명하며, 귀족들을 중심으로 조성된 신도시이기에 절과 건물이 엄청 컸다.
대표적으로 위의 도다이지가 대표적이겠다.
도다이지와 사이다이지라는 두 절을 중심으로 불교적 대도시를 건설했으나
강과 멀어 위생 관리가 까다로웠고, 그래서 전염병에 취약했다. 이는 습지개간이라는 과투자까지 해가며 헤이안 천도를 하게 된 원인이 된다.
헤이조쿄를 수도로 했던 시대를 '나라시대'라고 한다.
나라시대 이후에는 일본 불교의 진정한 중심지 역할을 하다가 수도 없이 불탄다.
나가오카쿄-현 교토부 나가오카쿄시 일대(784~794)
헤이안 천도를 앞두고 사용된 곳으로, 교토의 습지가 개간이 워낙 힘들다보니 나라시대와 헤이안시대 사이 10년 간 사용될 수 있었다.
시대가 지나면서 잊혀지다가 이 일대에서 관련 유물이 발견되며 재조명되었다.
지명에도 쿄(京)가 남아있어 수도였다는 사실은 이후에도 전해진 듯 하나, 시가지가 이동해 잊혀진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여기서 조금만 남쪽으로 이동하면 야마자키가 나온다.
산토리 증류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의 전투 장소 등이 있는 그 야마자키이다.
헤이안쿄/교토-현 교토부 교토시 일대(794~1868)
일본의 정통 미야코, 헤이안쿄(平安京)이다. 익히 알려져있듯 헤이안시대 이후에는 지금처럼 교토(京都)라고 불렀다.
원래는 엄청난 습지였기에 개간에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강이 적고 좁은 일본에서 이렇게 많은 강이 모이는 곳은 교토를 제외하면 전부 해안가다.
후지와라 4가문을 중심으로 귀족적 정치가 행해졌던 곳으로, 역설적이게도 이때문에 수차례 불탔던 곳이다.
겐페이 합전 이후에는 덴노의 권위가 유명무실해지기에 수도의 역할을 다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권력의 명분을 위한 상징적 역할만큼은 꾸준히 다해 왔던 도시이다.
이 도시의 역사를 읊으라면 끝이 없기에 간추리자면,
덴노와 황실을 상징하는 도시로 천년 넘게 존재해왔으며 그 덕에 도쿄 천도 이후에도 덴노의 즉위식은 교토고쇼에서 거행되고 있다.
후쿠하라쿄-현 효고현 고베시 주오구 및 효고구 일대(1180)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지은 임시수도로,
당시 황실과 조정의 주요 인사가 다이라 가문(헤이케)이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원래부터 다이라 가문의 본거지로, 남송과의 밀무역에 있어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 사후 몰락했기에 약 6개월만 쓰였으며,
겐페이 합전 당시 헤이케군의 본거지로 사용되었다가 이치노다니 전투 이후 방치되었다.
가마쿠라-현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일대(1185~1333)
가마쿠라 막부의 본거지가 있던 곳으로, 간토구보가 있던 곳이다.
개간 이전 간토평야에서 그나마 사람이 살만한 넓은 평야가 있던 곳으로 에미시 토벌의 중심지였으며
배산임해 지형이라 수비에도 유리했다.
교토와 거리가 있다는 건 가마쿠라 막부의 정치적 자율성을 줌과 동시에 교토 견제에 있어 한계점을 제공했고,
결국 가마쿠라 막부의 쇠락과 함께 교토 황실이 부활하며 가마쿠라 막부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전국시대까지는 대도시로 그 입지가 유지되었지만, 간토평야 개간 이후에는 그냥 옛날에 유명한 도시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물론 놀러갈만은 하다.
요시노-현 나라현 요시노무라 일대(1336~1392)
가마쿠라 막부가 몰락하고 들어선 겐무 신정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그렇게 유폐되어있어야 할 고다이고 덴노가 교토를 탈출해 반 아시카가 세력과 결집했고, 그렇게 남조가 세워졌다.
그 남조가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 나라 남쪽 끝의 요시노이며,
이 곳에 삼종신기 등 덴노의 상징이 모두 있었기에 정통성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요시노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쌓여있는 계곡이기에 평야는 넓지 않았지만 수비에는 상당히 유리했고,
그 결과 1392년 고카메야마 덴노가 북조에 양위하기 전까지 요시노는 함락되지 않았다.
지형만 보면 지금도 육군만으로는 함락이 불가능한 지형이라 할 정도로 험한 산맥에 둘러 쌓여있다.
참고로 북조의 수도는 교토였다.
무로마치-현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무로마치도오리 일대(1336~1573)
아시카가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교훈을 얻어 본거지를 아예 교토 내부의 무로마치에 건설했다.
그래서 무로마치 막부의 본거지는 교토와 거의 동일하며, 사실상 교토와 역사를 같이 한다해도 무방하다.
물론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되어 교토고쇼 옆 거리의 이름 정도로만 남아있다.
기요스성-현 아이치현 기요스시 일대
아즈치성-현 시가현 아즈치초 일대(1568~1582)
천하인 오다 노부나가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특히 아즈치성은 라쿠이치라쿠자령으로 유명하며,
기요스성은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고르는 기요스 회의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오사카성-현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일대
후시미모모야마성-현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일대(1582~1598)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교토 옆에 후시미모모야마성을 세웠고,
과거 혼간지의 본거지였던 곳에 오사카성을 세웠는데,
사실상 오사카성에 주로 머물렀고, 모모야마성은 거의 쓰지 않긴 했다.
오사카성은 오사카성 전투 이후 파괴되었다가 에도시대에 재건했지만, 번개로 불탔고 이후 콘크리트로 세워 지금에 이른다.
모모야마성은 도요토미에 의해 폐성되었다가 현대에 와서 복원되었다. 물론 상상에 근거해서 말이다.
슨푸성-현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일대(1605~1616)
에도막부 첫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마지막 본거지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거지하면 나고야성과 에도성이 유명하지만, 나고야성에 있을 때에는 천하인이 아니었고,
에도성은 후술할 것이라 슨푸성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직을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준 후 막부의 후견인인 오고쇼에 스스로 올랐으며,
슨푸성에 머물며 유학자들과 함께 막정에 간섭하곤 했다.
에도/도쿄-현 도쿄도 신주쿠구, 시부야구, 미나토구, 치요다구 등등 일대(1603~)
지금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이다.
에도성이 최초로 지어진 것은 15세기로 추정되며 이후 주인이 자주 바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간토가 개간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가 되었다.
에도막부 수립 후 일본의 정치적 중심지로 그 존재감을 뚜렷히 보였고, 보신전쟁 이후 도쿄로 개칭되어 일본의 정식 수도가 되었다.
참고로 도쿄시(Tokyo City)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며, 현대 일본의 수도는 '도쿄도 23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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