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글에서 이어집니다.
유신삼걸이 죽은 후 정권은 이토 히로부미와 오쿠마 시게노부를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이토는 문관관료들과 교류하며 조슈번 출신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던 인물이었고,
오쿠마는 대장성에서 활동하며 메이지 초기의 국가재정을 정비해 온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능력은 믿을 만했고, 오쿠보의 죽음으로 수뇌부가 사라진 일본에 필요한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이토가 정권을 잡았음은 곧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강경파의 발언권도 강해졌음을 의미했다.
야마가타는 재야인사들의 자유민권운동을 탄압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는 사직해 다시 한 번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했다.
민선의원설립건백서를 시작으로 각계 각층에서 새로운 시대의 체제를 제시한 건백서가 제출되었다.
문명론의 개략과 서양사정 등 서양의 제도에 대해 박식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물론이었고,
도사번사 출신인 가타오카 겐키치는 국회설립건백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유명인사가 아닌 각계의 의견에 대해서는,
'1880년 전후 일본자유민권파의 헌법인식과 헌법구상'이라는 논문을 참고하면 좋다.
공의여론의 실천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여기에 이타가키와 고토까지 참여한 것이었다.
이타가키는 공무에서 사직한 직후 애국사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1879년(메이지12) 이를 국회기성동맹으로 확대시켰다.
국회기성동맹은 전국 단위로 국회개설운동을 전개했고, 이러한 재야인사의 활동은 정권에게 있어 위협적이었다.
자유민권운동에는 국회개설만을 강조한 게 아니었다.
다양한 계층에서 제시된 의견이었기에, 뜻이 맞는 인물들이 정치단체를 만들었고,
그 중에는 극단주의적 성향의 단체도 있었다.
1881년(메이지14) 후쿠오카에서 도야마 미쓰루 등등이 겐요샤(玄洋社)를 수립했다.
겐요샤는 극단주의 정치단체의 뿌리로서 2차대전 패전 직후 해산되기 전까지 그 명목을 유지했다.
자유민권운동과 함께 태어난 정치단체들은 각자의 뜻과 이상에 따라 뭉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메이지 신정부 체제에 대한 불만을 기반으로 조직된 강경한 단체였다.
1881년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국회기성동맹을 확장시켜 아예 정당으로 만들어버린다.
일본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지금 자민당과 관계X)이 탄생했으며,
이후 후술할 메이지 14년 정변으로 오쿠마가 낙향하자 입헌개진당까지 등장했다.
메이지 신정부는 민권파에 대해 정부 전복의 음모가 있다고 모함하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함은 단순한 명분이 아닌 실천적인 탄압으로도 나타났다.
1881년 아키타의 입지사 단원들이 봉기하는 아키타 사건이 발생했고,
이 이후 정부는 자유민권운동이 정부 전복을 위한 항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1884년(메이지17) 군마의 민권파인사들과 마쓰카타 재정에 피해를 입은 사족, 농민들이 군마사건을 일으켰고,
뒤이어 이바라키현의 가바산에서도 민권파, 사족, 농민이 봉기하는 가바산사건이 발생했다.
그 영향으로 사이타마현의 치치부에서 천여명이 넘는 대규모 무장봉기인 치치부 사건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메이지 신정부가 자유민권운동을 단순히 탄압의 대상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헌법제정 및 총선거의 실시에 대해서 이토 역시 그 필요성을 공감한 상태였고,
사족들의 불만이 지속되면 이는 메이지 산업혁명의 걸림돌이 될 것이니 일단 잠재울 방법이 필요하기도 했다.
1876년 메이지 덴노가 일본국헌안 86개조를 공포했고, 1881년 메이지 신정부는 국회개설조칙을 발표했다.
1880년 집회조례와 공업방해죄를 제정해 민권파의 활동에 제약을 가함과 동시에
1890년을 목표로 제헌에 착수함을 전국에 알리기도 했다.
1882년(메이지13) 메이지 신정부는 입헌제정당을 창당해 여당의 역할을 구축하려했고,
기후 사건으로 이타가키가 습격당하고, 후쿠시마 사건의 자유민권운동이 격화되자
이타가키와 고토를 설득해 유럽에 보내 자유당을 와해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메이지 신정부는 단순히 탄압만을 반복한 것이 아닌,
법적 타당성을 추가함과 동시에 민권파의 요구에 호응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민권운동은, 일단 공의여론과 자유주의를 근거로 일어난 반정부운동이었기에,
신정부에 대한 분노를 달래주지 않으면 끝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회적 동요를 해소시켜준 것은 조선이었다.
임오군란으로 일본공사관이 습격당하고 인명피해까지 발생하자
신정부에 대한 분노여론은 그 방향성을 조선으로 틀어버렸다.
정한론이 다시 제기되었고, 민권파를 중심으로 강경정한론이 부활했다.
여기에 더해 민권파의 핵심인 이타가키, 고토, 오쿠마가 모두 이토에게 협력하며
자유당과 개진당이 더이상 반정부 스탠스를 취하지 않았고,
민권파가 그렇게나 주장한 제헌과 국회설립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며 자유민권운동은 조용히 끝나게 되었다.
자유민권운동이 남긴 것은 확실하다.
번벌파와 민당파로 정국이 양분되고 이는 이후 일본의 정당정치가 구성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주요 지식인들이 정계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정한론 등 제국주의적 면모를 확립하는 면모도 보여주었다.
메이지 헌법도 제정되었고, 내각제로 전환되었으며, 양원제 국회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유민권운동의 결말에 있어, 서양의 자유주의 혁명과 가장 큰 것이 있는데,
바로 자유주의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소외된 사족, 큰 이득을 보지 못한 농민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나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이타가키, 고토, 오쿠마도 내각에 자리 하나를 내주면 바로 탈당했고,
그렇게 민당들은 와해되고 동요하기를 반복했다.
이는 어쩌면 메이지 유신을 초기부터 참여했던 이타가키, 고토, 오쿠마가 지도자인 순간부터 예상가능한 한계였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놈이 그놈이었다는 거다.
사상적 지도자가 부재하여 정치적 명분 단계에서 발전하지 못한 게 자유민권운동의 한계였고,
이 한계는 어쩌면 핵 두방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일본의 정치사상적 역량의 발목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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