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의 부제를 붙이자면
외국인 법관 임용 문제가 적합할 것이다.
외국인 법관을 대심원(대법원)에 들이는 대신 영사재판권을 폐지한다는 것이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두 외무대신이 제안한 조약개정안의 핵심이엇고,
이는 조약개정교섭이 내부적 요인으로 실패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
1885년(메이지18) 초대 내각인 1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내각제 출범 직전에도 이미 정부의 대표 역할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던 상황이었기에,
이토가 내각총리대신에 올랐다고 해서 특별한 인사 교체는 진행되지 않았다.
이토의 친우이자 조슈삼걸 중 한명인 이노우에 가오루도 외무경에서 외무대신으로 직책만 교체되었을 뿐
전반적인 업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내각제 체제로의 전환에도 이노우에안은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었다.
1886년(메이지19) 이노우에 가오루는 그간 이런저런 이유로 연기되었던 조약개정회의로 본격화했다.
1차 조약개정회의가 개최되었고, 내지잡거와 영사재판권을 교환하는 식의 조약개정안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윗글에서 언급되었듯 외국인에 대한 일본법의 적용범위 등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도출된 것이 바로 '영사재판권을 폐지하는 대신 외국인 법관을 대심원에 임용하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영국과 독일이 주도하여 제시한 것이기에 '영독안'이라고도 한다.
1886년 10월 영국 국적의 화물선인 노맨턴호가 와카야마현 인근 해역에서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들은 표류한 후 인근 어촌에 도달했는데,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노맨턴호의 선장과 선원이 구조된 후 비인도적인 행위를 자행했으며 인종차별까지 행했고
이 문제는 결국 영사재판소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 영사재판소는 당연하게도 노맨턴호의 선장 및 선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오히려 영국은 이를 판결을 기반으로 일본에 그 책임을 뒤집어씨웠다.
당시 대동단결운동으로 결집된 민권파는 노맨턴호 사건과 그 처분에 대해 크게 분노했고
이러한 결과의 원인이 된 영사재판권을 폐지하라고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론이 들끓는 와중에 이노우에 외무대신은 영독안을 기밀로 부쳤는데,
영사재판권과 관련된 언급이 정치적 공격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잇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노우에 밀어붙이던 서구화정책과 로쿠메이칸의 무도회에 대해 민권파의 반발이 컸기에,
만약 영독안이 공개된다면 이노우에는 무조건 외무대신직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경로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각 법률고문 부아소나드는 영독안을 입수하였고,
영독안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영독안을 공개하고 말았다.
부아소나드는 영독안에 대해 영대차지(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를 금지하는 대신 부동산을 임대하게 하는 것)가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문제점,
외국인이 원고일 때뿐만 아닌 피고일 때도 외국인 법관이 재판을 담당한다는 점,
입법권에 대해서도 외국의 간섭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며 비판했고,
이러한 비판점에 대해 민권파는 물론이고, 다니 다테키 농상무대신도 동의하며 영독안에 반대하였다.
엎친 데 덥친 격으로 로쿠메이칸에서 무도회를 가졌던 이토 히로부미 내각총리대신이
고용된 매춘부인줄 알고 외국 외교관 부인을 성추행하는 대참사가 터지고 말았다.
영독안과 서구화정책에 대한 크디 큰 반발이 이노우에를 덥쳤고, 결국 1887년(메이지20) 9월 이노우에는 사임하게 되었다.
1888년(메이지21) 1차 이토 내각은 새로운 외무대신으로 입헌개진당을 이끌던 오쿠마 시게노부를 내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직에서 사임해 추밀원 의장에 취임하면서
구로다 기요타카를 총리로 하는 구로다 내각이 출범했다.
오쿠마는 외무대신에 유임되었고, 오쿠마 시게노부가 중심이 되는 조약개정교섭이 진행되었다.
오쿠마는 우선 이노우에의 열국회의에서 주요 6개국(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와의 개별교섭으로 전환시켰다.
오쿠마의 조약개정교섭은 그 중에서도 일본의 입장에 호의적인 미국, 독일, 러시아와의 교섭에 집중했고,
영국, 프랑스와의 조약개정교섭은 미루는 전략을 세웠다.
이러한 전략은 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최혜국 대우가 쌍무적이 아닌 편무적 최혜국 대우라는 점이었다.
미국, 독일, 러시아와의 조약개정에 성공한다 해서 신조약을 영국과 프랑스가 따라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는 오쿠마의 조약개정교섭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오쿠마의 조약개정안은 전반적으로 영독안을 계승했다.
비록 조약개정안에는 외국인 법관 임용과 법전 편찬 기한에 대한 내용이 없어졌으나
외무대신 선언문에 포함시키는 일종의 꼼수를 단행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내각 내에서도 반발이 있었던 영독안이 유지되었으니 민당파와 내각 내부에서의 반발 모두 예상이 가능한 것이었다.
오쿠마안에 대해 처음 지적을 제시한 건 주미 일본공사였던 무쓰 무네미쓰엿다.
무쓰는 오쿠마안이 제국헌법에 저촉된다고 지적했고, 이를 법제국장관 이노우네 고와시가 동의하면서 논란이 거세졌다.
국권파를 조직해 자유민권운동으로 뛰어든 다니 다테키, 대동단결운동으로 규모가 확장된 민권파도 비판을 가했고,
부아소나드 역시 오쿠마안에 대해 반대를 표했다.
결국 추밀원과 원로원에서도 조약개정안 철회를 제안했으나
오쿠마 외무대신을 필두로 구로다 내각총리대신과 구로다 내각은 조약개정안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1899년(메이지 22) 이노우에 가오루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도 이를 무릅쓰고 조약개정안을 밀어붙인 오쿠마는
퇴근 도중 극단주의 민권파 단체 겐요샤(玄洋社) 사원 구루시마 츠네키에 의해 폭탄테러를 당했다.
천주였다.
오쿠마는 다리 하나를 잃는 중상을 입었고, 다음날 이토 히로부미 추밀원 의장에 의해 오쿠마안은 폐기되었다.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총리대신은 직후 사임했고, 내각이 전부 총사임했다.
산조 사네토미가 임시 내각총리대신에 올랐고, 조슈삼걸을 통해 조약개정교섭의 중단을 많은 나라에 알렸다.
그렇게 이노우에 가오루와 오쿠마 시게노부의 조약개정교섭마저 실패로 끝이 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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