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초반기는 2차대전기 일본의 핵심 문제점 중 하나인 육해군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물론 원래부터 육해군이 대립해온 것은 절대 아니었다.
육군은 적진으로의 진격과 점령이라는 선봉장의 느낌과 이후의 점령지 관리를 맡았다고 한다면,
해군은 그 진격과 점령에 필요한 이동 및 이를 위한 제해권 장악, 그리고 보급을 담당했다.
상호보완전 관계이고, 메이지시대의 군사적 영광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역시 육해군이 힘을 합쳤기에 나온 결과였으며,
애초에 덴노헤이카의 명령을 따르는 군대 내에서 보직이 다르다고 해서 반목하는 건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일본 육군의 뿌리로는 게이오 개혁으로 출범한 막부육군과 다카스기 신사쿠가 세운 기헤이타이가 언급된다.
이 중 주목할만한 것은 역시 기헤이타이인데,
기헤이타이는 막말유신기의 정식군사조직처럼 활동했고,
기헤이타이를 이끈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보신전쟁 당시 신정부군의 선봉으로 활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메이지 신정부의 군사 방면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중용되었고, 야마가타를 기반으로 조슈 출신인사들이 대거 중용되었다.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고다마 겐타로, 오카 이치노스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다나카 기이치
모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맹활약했고, 메이지와 다이쇼시대에 육군 핵심인사로 활동한 사람들인데
전부 조슈번(나가토국, 스오국) 출신이다.
한편 해군의 경우 시작이 육군에 비해 늦었다.
원래 일본 해군의 시발점으로는 가쓰 가이슈가 세운 나가사키 해군전습소과 막부해군이 언급되지만
이러한 일련의 노력이 메이지 초기의 해군력으로 이어졌다 보기는 힘들다.
본격적으로 해군을 양성한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후원으로 세워진 해군병학교였지만, 서남전쟁으로 페지되었고,
서남전쟁 이후에 서남전쟁에 참전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 일본 해군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라 보는 게 편하다.
막말변혁기 그 어느 지역보다 항해술과 군함 건조 등에대해 집중했던 번은 사쓰마번이었고,
실제로 막말변혁기 사쓰마번의 주도로 파견된 유학생들이 메이지시대 일본 해군의 기반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위의 도고 헤이하치로이고, 사이고 주도, 야마모토 곤노효에, 사이토 마코토 등도 사쓰마 출신이었다.
이런 식의 차이를 보였다고 해서 무조건 육해군이 대립했던 것은 아니다.
오야마 이와오, 사이고 주도처럼 육군대신을 경험한 사쓰마 출신인사도 있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에 의해 육군 내의 조슈파벌이 형성되어서 그렇지 메이지시대까지는 출신가지고 구별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점차 육해군 간에 이견 차이가 발생했다.
원인은 당연히 돈이었다.
데라우치 내각의 실책
오쿠마 시게노부의 내각과 1차대전이토가 죽고 연호가 바뀌며 정국은 전반적으로 야마가타파의 입맛에 맞추어 변화해갔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야마가타파에서도 대안이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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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군예산에 있어 해군이 육군보다 더 가져가는 경향이 있었다. 군함을 건조해야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면서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의견이 대두되었고, 이는 당연히 재정적 부담이 있는 일이었다.
물가는 상승 중이고, 이를 전쟁을 빌미로 미봉 중인데,
여기에 돈 쓸일을 더 만들면 그 역효과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예산을 옮기는 식으로 진행해야했고, 그 과정에서 해군 예산이 대폭 깎였다.
게다가 전쟁 이후, 육군은 시베리아 출병군을 늘려야한다고 주장했고,
해군은 오히려 남양군도 위임통치령 등에 대한 관리 및 태평양 전선 수비 등을 이유로 해군 예산 증설을 주장했다.
물론 시베리아 출병이 대실패로 끝났기에 이때의 육해군 대립은 단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이견이 좁혀진 것은 아니었다.
한편 오늘도 몸이 안좋은 다이쇼 덴노는 정무 수행에 차질을 빚으며 모두를 갑갑하게 하였고,
당시 만으로 열여덟이던 히로히토 친왕이 성인이 되면 바로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안아파도 정무 처리가 느린 다이쇼 덴노인데 아프기까지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만 나이가 나이이고, 대리청정은 곧 향후 후계자로 공인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일종의 중간과정이 필요했다.
황태자 책봉식, 황태자비 옹립. 그 중 핵심은 역시 황태자비 옹립에 대한 것이었다.
이 당시 차기 황태자비로 유력했던 것은 이치조 도키코였다.
원래 황후는 고셋케 중 이치조 가문과 구조 가문이 돌아가며 하는 전통이 있었고,
메이지 덴노의 쇼켄 황후가 이치조 가문 사람이고, 다이쇼 덴노의 데이메이 황후가 구조 가문 사람이었으니
다음 차례는 이치조 가문이 가져가는 게 정황 상 맞아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혼사를 지지한 게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는 것이었다.
이 당시 데이메이 황후는 대놓고 야마가타를 혐오했다.
야마가타는 메이지 덴노와 다이쇼 덴노를 비교하며 자중 꾸중을 놓았고, 심지어는 다이쇼 덴노에게 인사도 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리 유신 공훈이 큰 화족이라 해도, 유신 이후의 체제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고 해도,
그 모든 권위는 덴노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감히 덴노를 무시하였던 것이었다.
남편이 대놓고 무시당하는 꼴을 보니 데이메이 황후는 궁내성에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했고, 결국 이때 터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틈을 해군 측 인사들이 물고 말았다.
해군 측 인사들은 야마가타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겸, 1차대전과 쌀 소동으로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황태자비로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을 옹립할 것을 황실에 제안했다.
아무리 이치조 가문과 구조 가문이 돌아가며 황후를 배출했다지만 이건 성문화된 법이나 제도는 아니었고,
정확히 말하면 황후에 대한 전통은 '고셋케와 황족 중 좋은 사람으로 한다'였기에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의 황태자비 옹립은 그 어떠한 절차 상 문제를 대동하지 않았다.
결국 데이메이 황후의 주도로 1918년(다이쇼7)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히로히토 친왕의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이 결정은 당연하게도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심기를 제대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해군 측의 의견이 야마가타의 의견을 무시하고 채택된 것이기도 하지만,
사쓰마번이 장악한 해군이 옹립한 황태자비의 외가가 시마즈 가문, 즉 사쓰마번주의 가문이었다.
하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정치적 권한은 이를 번복시킬 수 있는 것이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시마즈 가문의 유전적 문제를 명분으로 황태자비를 교체하기 위한 공작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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