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부제목을 하나 달자면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 물론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군사학이나 전술 무기 등에 대한 부분은 생략할 것이다.1904년 2월 8일 인천일본 군함의 호위를 받은 수송선 몇대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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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났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문제는 펑톈 함락과 쓰시마 해전 이후 러시아와 일본 양측 모두 전쟁을 더 진행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경제가 박살났고 결국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황실을 등돌린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전쟁에 하급 장교와 예비군 및 보충역까지 전부 동원한 결과 인명피해가 심각했고
여론도 여론이지만 이제는 더이상 동원할 병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를 타계할 방법은 결국 종전이었지만 문제는 러일 양측 모두 겉으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비록 양측 모두 전쟁을 진행시킬 여력이 바닥난 걸 알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아직 모든 병력이 패배한 게 아니라는 자기위로를 하고 있었고,
일본은 청일전쟁처럼 진격하라는 국내여론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럴 때에는 결국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었다.
서로 한발 씩 물러나게 하면 이미 끝난 전쟁을 진짜 끝낼 수 있었고,
이를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미국이었다.
당시 '극동의 헌병' 일본이 필요해진 나라 중 하나가 미국이었고,
일본은 미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은 필리핀의 안전을 위해 서로에게 접촉 중이었다.
이러한 정황 속 일본은 미국에 러일전쟁 종전을 위한 중개를 요청했고, 이를 미국이 승낙하면서
러일 간 종전 협상이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이거 개최지를 두고 러시아, 일본, 미국 측 의견이 갈려서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다.)
일단 협상장은 보스턴 북쪽의 항구도시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로 결정되었다.
보통 이 도시를 2000년대 초중반 돌풍을 이끈 포츠머스 FC의 영국 포츠머스인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미국이다.
당시 폭염이 심하기도 했는데, 포츠머스는 피서지기도 했고, 양국 대표가 기거할 만한 호텔도 있어 적당하다는 이유였다.
참고로 포츠머스를 협상장으로 주장한 인물은 당시 일본국 외무대신이었던 고무라 주타로였다.
미국의 중재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가지는 모든 우월권을 인정하고 일본이 한국에 행하는 모든 조치를 승인한다.
러일 양군은 요동반도를 제외한 만주에서 철수하며, 러시아는 창춘-다롄 철도 등의 운영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일본이 러시아에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가라후토)를 일본의 영토로 한다. 단 이 지역은 비무장지대로 설정한다.
본격화되는 조선 침탈
시간을 잠시 돌려서 1904년(메이지37) 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잠시 언급해보자.대한제국은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1월 고종황제가 직접 중립국임을 선언했으나 무시당했고결국 인천항이 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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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한국 이야기는 위 글에서 했으니 생략하고,
중요한 건 일본이 한국 및 남만주에 대한 우월성을 보장받았다는 것이다.
몇 달 후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뤼순 조차지에 관동주를 설치하고 이후 수많은 사건의 원인이 되는 관동군을 창설했다.
즉 대륙침탈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게다가 덤으로 영토까지 가져왔으니 이는 시모노세키 조약에 준하는 영광이 아닐까?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다음날
황거 앞 히비야 공원에는 수많은 군중이 몰려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시위를 시작했다.
시모노세키 조약과 비교하면, 2억냥에 달하는 엄청난 배상금 수익이 빠져있었기에,
인명 갈아넣어서 얻은 게 겨우 가라후토 반쪽이냐는 항의였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국수주의의 바람이 제대로 불어있던 상태였고, 그 여파로 이럴 바엔 전쟁 계속하자는 의견이 강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히비야 시위 중 누군가가 방화를 시작하면서 이는 폭동으로 점화되고 말았다.
분노한 민중들은 파출소, 어용언론사인 고쿠민신문사, 정부 관료 사저등에 방화했고, 이대로면 도쿄 불바다 될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구국의 결단 비슷한 걸 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폭동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대일본제국을 수호하고,
일본인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폭동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문명 개화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히라누마 세키에츠)
라는 말은 백몇년 후의 버러지가 한 걸 패러디한 것이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히비야 방화 사건을 이유로 1차 가쓰라 내각이 계엄령을 발동했다는 것이었다.
부정선거랑 예산 삭감보다는 방화 폭동이 계엄령 발효에 더 적합해 보이네.
문제는 히비야 방화 사건에 대해 야당격이었던 민당파와 입헌정우회가 전부 암묵적 지지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즉 포츠머스 조약에 배상금이 없다는 이유로 야당과 국회 역시도 내각을 공격했고,
결국 가쓰라 내각은 야당과의 합의에 이를 수 밖에 없었다.
1905년(메이지38)이 끝남과 함께 정우회는 야마가타파와 정권 교대에 대해 합의했고(정우회-야마가타 합의)
이 합의에 의거해 가쓰라 총리는 입헌정우회의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정권을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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