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봉환(大政奉還)
국정을 봉하여 조정에 돌려주었다해서 좌막파와 도막파의 충돌이 사라진다는 건 말이 안되겠다.
최종결정권자가 선택했다고 그 선택을 무작정 존중하는 건 천주의 시대 일본에서 말이 되는 게 아니다.
말이 되었으면 존황양이 따위 진작에 끝났지.
오사카성으로 퇴각한 요시노부 쇼군의 앞으로
아이즈번주이자 교토수호직이었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구와번주이자 교토소사대를 총괄한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고베 해군교습소의 설립자였던 가쓰 가이슈 등이 진언했고
결국 요시노부 쇼군도 좌막파인사들의 뜻에 동참하게 되었다.
1868년(게이오4) 음력 1월, 아직 연호도 바뀌지 않은 무진년초
사쓰마번이 장악한 조정에서 요시노부 쇼군의 영지와 내대신 직위를 반환하기로 결의했고,
요시노부 쇼군은 이에 대한 항의로 오사카성에서 거병한다.
효고항에 정박 중인 사쓰마 군함에 포격했고, 사쓰마가 장악한 조정을 되찾기 위해 교토로 진군시켰다.
무진(戊辰)년에 시작되어 보신전쟁이라고 한다. 일본사에서 연호가 쓰이지 않는 몇 안되는 케이스이다.
우선 나는 전쟁사에 관심이 크지 않아, 전술이나 무기 등에 대한 설명은 최소화하고
정치적인 방면에서 보신전쟁을 서술할 것임을 알린다.
막부군이 선택한 교토 진군로는 도바가도와 후시미정(현 교토부 후시미구 교마치 일대),
그리고 요도번(현 교토부 후시미구 서남부 일대)과 야마자키(교토부 오야마자키정 일대)였다.
우선 막부는 도바-후시미 방면에 15000의 병력을 보냈고, 그 지역의 신정부군은 5000에 불과했으나,
도바 방면의 군대는 아무것도 못하고 신정부군에게 털리고 만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도바 방면의 주력인 아이즈번의 군대는 아이즈번의 주력군도 아니었고,
무기도 이 지역을 지킨 사쓰마측이 훨씬 좋았다.
후시미 방면은 신정부군이 뚫어내는 데에 성공했으나 교토 외곽에서 사쓰마군의 포격에 발이 묶였고
결국 교토 진입에 실패해 퇴각하고 만다.
그러자 막부군은 차선책인 요도번과 야마자키 방면을 공략하나,
조정은 교토 공격의 책임으로 막부를 조정의 적으로 규정했고, 신정부군에 니시키노미하타(錦の御旗)를 내려 황군으로 규정해준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요도번은 막부에 호응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막부군이 요도성을 공략하려 하자 그들의 눈 앞에 니시키노미하타가 등장했다.
결국 막부군은 이번에도 소득 없이 퇴각했고, 막부군은 그대로 오사카성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막부군이 돌아온 오사카성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좌막 측에서도 온건파였고,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최대한 무력충돌을 지양하려 했다지만
도바 후시미 전투와 요도 야마자키 전투 직후 도망간 것은 지금도 두고두고 까이는 요인이 되어버린다.
요시노부 쇼군 내외, 이에사다 쇼군의 부인인 덴쇼인, 이에모치 쇼군의 부인인 가즈노미야 지카코 친왕,
아이즈번주 내외, 구와나 번주 내외는 챙기고 갔으면서,
에노모토 다케아키, 교토 미마와리구미, 신센구미 등의 전선의 투입된 인력은 전부 버리고 에도로 도망간 것이었다.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은 싸워야 하니 막부군은 에도로 퇴각을 결정했고,
이러한 상황이 나오니 서국의 주요 번들이 하나하나 신정부군에 붙어버리게 되었다.
이이 나오마사, 이이 나오스케의 히코네번, 고산케 중 하나인 오와리번이 신정부에 가담했으며,
막부군에 붙었던 서국의 번들도 결국 신정부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에도로 가는 먼 길을 막부군과 공유한다는 건,
신정부 입장에선 오사카의 막부군을 일망타진할 기회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저 막부군의 주축에는 항상 자신들을 괴롭히고 위협한 존재
교토 미마와리구미와 신센구미가 있었다.
막부는 신센구미를 갑양진무대로 개편해 시나노(현 나가도현)에서 가이(현 야마나시현)로 향하는 고슈가도를 막도록 명령했다.
오다와라번도 신정부에 붙어버린 마당에 대체 저기를 막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기는 하지만,
만약 막는다면 고신에츠를 기반으로 동서양분도 가능해진다.
가이국 가쓰누마에서 곤도 이사미와 히지카타 도시조가 이끄는 갑양진무대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다니 다테키가 이끄는 신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험한 날씨로 진군에 차질이 생겨 곤도 이사미는 고부성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신정부군이 한발 먼저 고부성을 장악했고,
결국 갑양진무대는 가쓰누마에 고립되어버린다.
히시카타 토시조는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에도로 이동했고, 그러는 사이 갑양진무대는 신정부군에 포위되어 대패했다.
사카모토 료마 노형을 죽인 범인(이라고 당시에 생각되었던) 신센구미가 생포되었으니 신정부군이 이를 그냥 둘리가 없었다.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가쓰 가이슈의 탄원서에도 불구하고 처형되었으며,
가쓰누마 전투로 히지카타 도시조를 따라 에도로 이동한 일부를 제외하고 신센구미는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신정부군은 점차 에도를 향해 진군했고, 도호쿠 대부분을 제외한 일본 전역이 존황파에 붙어버린 상황
신정부군의 사령관 사이고 다카모리가 회담을 제의했다.
이미 에도성 내에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풀어놓은 사쓰마어용도로 인해 치안이 좋지 않았고,
에도성 니시노마루 소실, 사쓰마번사 저택 소실 등등 충분히 불안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미 에도성에 깔려있는 밀정들이 에도성 내 주요 다이묘나 유력인사를 회유하던 상황이었다.
이러면 이제 그냥 공격하면 되겠다 싶겠지만, 에도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은 명성(名城)이다.
단기간에 함락하지 못하면 도호쿠 곡창지대의 아이즈번, 나가오카번, 쇼나이번의 힘으로 버틸 수도 있다.
언젠가는 신정부군이 이기겠지만 장기전으로 확대되면 그 피해는 분명할 것이다.
그러니 사이고 다카모리의 요구는 간단했다.
성문을 열어라.
막부 측 대표 가쓰 가이슈와 신정부측 대표 사이고 다카모리는 수차례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그 회담의 결과, 에도막부는 에도성의 문을 열고 조정과 신정부에 항복을 선언했다.
1868년(게이오4) 음력 4월 11일. 보신전쟁이 시작한지 세달여 지난 시점이었다.
이러한 선택에 분노한 막부군은 에도로 진격한 신정부군을 공격했지만,
우에노 전투에서 대패해 나가오카번, 아이즈번, 쇼나이번으로 퇴각하고 만다.
이 전투가 있었던 우에노 공원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에도성에 무혈입성한 댓가로 막부의 중신들에 대한 처분은 근신 정도로 끝마쳤다.
그리고 대부분 금방 근신 처분이 해제되었다.
요시노부 쇼군 역시도 1869년(메이지2) 평화로운 정권 이양에 대한 기여를 이유로 징계 해제되었고,
역사의 전면에서 모습을 감추었을 뿐 화족대우를 받으며 좋은 대접을 받고 장수하다가
1913년(다이쇼2)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6세.
하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히시카타 도시조가 이끄는 막부군 주력이 남아있었고,
좌막의 기치를 유지 중인 나가오카번, 아이즈번, 쇼나이번이 남아있었다.
비록 대세는 기울었지만 저들이 고개를 숙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일본 근현대사 > 메이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이지 유신의 시작 (0) | 2024.10.17 |
---|---|
보신전쟁 2 (0) | 2024.10.17 |
메이지 유신을 성과라는 방면에서 바라보려면 (0) | 2024.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