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공황과 지조증징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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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6년(메이지29) 새로운 총리에 오른 것은 마쓰카타 마사요시였다.마쓰카타는 1892년(메이지25)의 선거간섭 이후 이토 히로부미 와는 정치적으로 척을 진 상태였고그렇기에 내각에 이토파 혹은 이토 내각의 관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전임 내각이 2차 이토 내각이 아닌, 구로다 임시 내각이었기에2차 마쓰카타 내각에는 2차 이토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유임되었지만전부 며칠 내로 교체되었다. 예를 들자면외무대신과 문부대신을 겸임하던 사이온지 긴모치는외무대신에 오쿠마 시게노부, 문부대신에는 하치스카 모토아키가,내무대신은 이토가 영입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대신 가바야마 스케노리 전 대만총독이,육군대신은 오랜 기간 육군대신을 역임했던 오야마 이와오 대신 다카시마 도모노스케가,사법대신에는 기요우라 게이고가 내정되었다...
일본 최초의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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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헌법 제정이 완료되었고, 국가 기관 및 내각에 대한 개편이 완료되었다면 그 다음은 국회의 설립일 것이다.메이지 덴노 역시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고, 국회 개설을 위한 총선거를 명령하려했는데,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이 폭탄테러를 당하고 구로다 내각이 총사임하며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1889년(메이지22) 말 산조 임시내각을 대체하여 제국외희 개설을 위한 총선거를 위해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내각총리대신에 내정되었다.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누구인가.번벌파 무관 정치인의 상징이고, 정당 없이 의견을 통일시키고자 한 초연주의의 대표자아닌가.즉 3대 총리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내정되고, 그를 중심으로 총선거를 준비한다는 건 민권파 입장에선 부정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1880년말 민권파는 이미 정치 참여를 위해 그 준..
오쿠마재정과 마쓰카타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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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시간을 다시 앞으로 돌려보자.1877년(메이지10) 발생한 서남전쟁은 분명 메이지 신정부가 순조로이 승리한 전쟁이었다.문제는 식산흥업정책과 각종 인프라 및 생산시설 건설에 국가 재정을 들이붙는 상황에서전쟁 비용이 추가로 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국립은행 설립과 기업공채의 남발 등으로 민간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이 과다한 상황이었고,저관세로 인해 무역 수익이 그리 많지 못한 상황에서 세수입원도 애매했다.시중에 도는 화폐의 양을 조절할 방법이 당시 메이지 신정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고,이대로면 급작스럽고 과도한 인플레이션의 발생을 눈 뜨고 봐야할 실정이었다.당시 대장경 오쿠마 시게노부는 정부지폐를 수집해 이를 소각하여 시중의 화폐 유통량을 줄이려고 노력했다.그럼에도 식산흥업정책을 줄일 수 없었기에 기업공채를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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