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정이 완료되었고, 국가 기관 및 내각에 대한 개편이 완료되었다면 그 다음은 국회의 설립일 것이다.
메이지 덴노 역시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고, 국회 개설을 위한 총선거를 명령하려했는데,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이 폭탄테러를 당하고 구로다 내각이 총사임하며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1889년(메이지22) 말 산조 임시내각을 대체하여 제국외희 개설을 위한 총선거를 위해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내각총리대신에 내정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누구인가.
번벌파 무관 정치인의 상징이고, 정당 없이 의견을 통일시키고자 한 초연주의의 대표자아닌가.
즉 3대 총리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내정되고, 그를 중심으로 총선거를 준비한다는 건 민권파 입장에선 부정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1880년말 민권파는 이미 정치 참여를 위해 그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유럽 외유에서 돌아온 고토 쇼지로는 1차 이토 내각의 서구화정책을 비판하는 유지간담회를 열었고,
대동단결운동이 진행되며 대동협화회와 대동클럽이라는 두개의 정치단체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오쿠마안에 대해 거세게 반발했으며, 오쿠마안을 저지시키기 위한 건백서를 185건이나 제출하기도 했다.
1890년(메이지23) 1월, 선거를 앞두고 오이 겐타로는 대동협화회를 자유당으로 개편했다.
과거 이타가키가 세운 자유당을 계승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이타가키와 고토의 호응도 기대할 수 있었다.
자유당은 대동클럽, 규슈진보당 등의 자유민권운동 정당은 물론, 이타가키의 애국공당과도 힘을 합쳤고,
1회 총선거 이후 이들은 합당해 입헌자유당을 결성했다.
이러한 동향을 번벌파가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대성회를 결성해 여당으로 삼았고, 총선 이전 초대 귀족원을 구성하기도 했다.
초대 귀족원은 공후작 38인, 백작, 자작, 남작 105인, 다액납세자(기업인, 자본가, 화족) 45인,
그리고 덴노가 임명한 60인의 칙선의원으로 구성을 끝마쳤다.
전반적으로 번벌파 및 번벌파와 연관있는 인사들이었기에 민권파는 거의 배제되었다.
1890년 7월 1일, 1회 중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자격은 25세 이상의 성인 남자 중 15엔 이상 납세한 자로 한정되었는데,
그렇게 유권자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1%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때 일본은 아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는 민권파의 압승이었다.
이후 입헌자유당을 구성하는 자유당, 대동클럽, 애국공당 3당이 획득한 의석은 130석,
민권파로 분류할 수 있는 오쿠마 시게노부의 입헌개진당은 41석을 획득해
민권파가 과반을 확보한 것이었다.
반면 대성회는 79석을 얻는 데에 그쳤다. 번벌파의 압도적인 패배였다.
일본 최초의 중의원은 야당인 민권파가 장악했고, 그렇게 여소야대 정국이 진행되었다.
이런 식의 정국에서 여야, 내각과 국회가 갈등을 빚기 가장 좋은 소재라고 한다면 역시
예산안일 것이다.
중의원의 민당파는 지조개정경감 등을 필두로 국가 지출을 감소시키라고 요구했고,
이는 군비 및 국가 사업의 확장을 도모하던 내각과 상충하는 것이었다.
내각의 끈질긴 요구에도 국회는 651만엔이 삭감된 예산안을 제시했다.
원로원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예산안은 해를 넘기게 되었다.
결국 대장대신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귀족원으로 가 예산안 확정이 장기화되면 국가대사가 심히 우려된다고 귀족원을 설득했고,
그렇게 예산안이 통과되었다.
그런데 그러면 삭감 650만엔은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
법제국장관 이노우에 고와시는 국가사업에 쓰자고 제시했고,
그 덕에 1892년(메이지25)의 예산안은 1891년의 예산안보다 1100만엔이 증가하는 역효과로 이어졌다.
게다가 민권파가 강력하게 주장해온 지조개정 경감안은 귀족원의 거부로 취소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국에서 1891년(메이지24) 5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1차 야마가타 내각이 끝이 나게 되었다.
후임 내각총리대신에는 마쓰카타 마사요시 대장대신이 임명되었다.
마쓰카타가 귀족원을 설득했던 것을 생각하면 집회조례 제정, 군인칙유 반포 등을 행한 야마가타에 비해 온건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마쓰카타는 야마가타 비해서 더하면 더했지 덜한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1891년, 다음 해를 위한 예산안에서 다시 군비가 삭감되자
군측 인사, 특히 군함 건조 및 구매로 돈이 많이 들어야할 해군에서는 이러한 예삭 삭감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가바야마 스케노리 해군대신(사쓰마 출신)이었고,
가바야마는 지금까지의 메이지 유신에 있어 그 성과는 삿초번사들이 노력한 결과라는
만용연설(蠻勇演說)을 발표했다.
이 이후 민당파와 내각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중의원이 해산되었다.
1891년 12월 25일, 일본 최초의 중의원 해산이었다.
중의원 해산 이후 가바야마 해군대신과 시나가와 야지로 내무대신(조슈 출신)은
폭력적으로 민당을 탄압할 계획을 내각에 제출했다.
당시 고토 쇼지로 체신대신, 무츠 무네미츠 농상대신은 입헌정치를 훼손시킬 수 있어 선거간섭에 반대했고
내각 뿐만 아니라 추밀원의 이토 히로부미 등도 이러한 선거간섭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개입이 자행되었고, 이타가키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으며 유혈사태까지 발생했으나
2회 총선거도 민당파의 승리로 끝이 나버렸다.
2회 중의원 총선거 이후 민당파는 당연히 시나가와 내무대신과 가바야마 해군대신의 사임을 요구했다.
비록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총리대신이 이에 호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시나가와의 내각 잔류에 비판했고, 결국 시나가와가 사임하면서
마쓰카타와 이토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