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대로면 원래 안세이 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하지만
지금 이 사람 언급 안하면 타이밍을 완전히 놓치니, 언급을 하고 가야 하겠다.
요시다 노리가타. 호인 쇼인(松陰)으로 유명하다.
조슈번 출신이자 조슈번을 대표하는 영재로, 19세때부터 번교의 사범으로 무사들을 가르친 인물이다.
난학과 양명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로, 한문 암기 등에 대해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아편전쟁 등 세계정세가 불안해지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쇼인은
나가사키로 이동해 서양의 함선과 문물을 직접 조사하고 수학했으며,
에도로 이동하여 사쿠마 쇼잔과 교류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쇼인은 조슈번주에게 소큐시겐(将及私言) 제출하기도 했는데,
대충 막부를 토벌하고 왕정으로 복고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853년(가에이6) 흑선이 우라가에 내항하자 이를 보기 위해 에도로 이동했고,
흑선에 몰래 잠입하려다 체포되어 조슈번으로 압송되었다.
조슈번은 쇼인에게 근신처분을 내리며 2년 간의 구금을 끝냈고, 이후 쇼인은 후학 양성을 시작하는데,
이때 쇼인의 명성을 듣고 전국의 인재들이 쇼인에게 수학하기 위해 조슈로 향했다.
원래 이런 식의 과외는 불법이지만, 결국 규모가 커져 결국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 때 쇼카손주쿠에서 수학한 인물로는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구즈이 겐즈이,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등,
막말과 메이지 유신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당시 쇼인이 언급한 것들은 이후 세대에 큰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덴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
민초들의 굴기와 적극적인 시행을 주장하는 실행론
약소국이 강국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를 기반으로 하는 정한론
1858년(안세이5) 안세이 5개국 조약이 체결된다.
존황양이론을 강조했던 쇼인의 시각에서 이는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 로주 암살 계획까지 자행하고 만다.
비록 이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 혐의만으로 죽을 이유는 충분했다.
결국 1858년(안세이5) 이이 나오스케가 주도한 안세이 대옥에서 요시다 쇼인은 참형된다.
향년 29세.
그의 다음 세대라고 언급되는 인물들이 적게는 세살, 많게는 열몇살이라는 걸 감안해,
만약 그가 살아서 메이지라는 연호를 봤다면 일본의 정치는 다른 국면을 맞았을 수도 있겠다.
여담으로 한국에서 요시다 쇼인이 주목받게 된 것은 아베 신조 전 총리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고, 부친인 아베 신타로의 장례식 추도사 및 국회 발언 등에서 쇼인을 언급했다.
그 덕에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쇼인에 대한 주목도가 올라갔지만
사실 근대 일본을 만든 건 쇼인에게 수학한 이후 세대라고 보는 편이 좋으며,
그 영향력 역시, 언젠가 언급할 사카모토 료마쪽을 좀 더 강조하는 게 낫다고 내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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