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히코네번의 후다이 다이묘이며, 그의 조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붉은 귀신 이이 나오마사이다.
히코네번의 번정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비할 데 없는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 에도로 와서 우라가 수비를 담당했다.
흑선사건을 목격하자마자 그간의 쇄국론을 포기하고 개국론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아베 마사히로 중심의 막정에 있어 외교 방면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겸사겸사 아베 마사히로, 홋타 마사요시 등과 함께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후계자로 옹립하며
난키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안세이 5개국 조약이 난키파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고,
히토츠바시파 다이묘들이 이에 불만을 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정치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안세이 5개국 조약에 대해 고메이 덴노가 유례없이 불만을 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교 등의 업무는 본래 막부가 관할하고 이후 조정에 칙허를 받는 식이었는데, 안세이 5개국 조약은 칙허가 상당히 늦었고,
그렇다하여 막부와 조정의 서열을 감안하면 조정이 무언갈 할 수는 없었다.
막부가 난키파와 히토츠바시파로 양분되고, 민간에 존황양이론이 떠도는 정국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당시 일본 조정은 고메이 덴노에 의해 태합과 관백이 전부 교체되고, 이를 기점으로 고메이 덴노의 친정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고메이 덴노는 칙허가 늦었다는 이유로, 안세이 5개국 조약에 대한 칙허를 거부한 것이었다.
중간에서 낙동강 오리알이 된 다이로 홋타 마사요시는 그대로 막부에 의해 파면되었고,
이이 나오스케가 다이로직에 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이런 정국에서 이에사다 쇼군의 병세는 더더욱 심각해져갔다.
1858년 8월 13일(안세이5 음력 7월 5일)
이에사다 쇼군은 갑자기 병석에서 일어나 쇼군으로의 카리스마를 보였다는 구라같은 팩트같은 구라같은 모습을 보였고,
갑자기 쇼군 후계자에 기이번의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임명한다.
당시에도, 그리고 현재 학계에서도, 이 선택은 이에사다 쇼군이 아닌 이이 나오스케가 했다는 게 정설이다.
참고로, 도쿠가와 이에사다 쇼군은 저 다음 날인 안세이 5년 음력 7월 6일에 사망한다.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정식 후계자가 되었음은 곧 난키파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했다.
즉, 차기 쇼군의 권위를 위해 히토츠파시파는 숙청의 대상이 되었고,
이이 나오스케는 요시토미가 차기 쇼군으로 확정된 그 날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슌가쿠), 전 미토번주 마쓰다이라 나리아키에 은신 및 근신 처분을,
미토번주 마쓰다이라 요시카츠에게 에도 입성 금지 및 근신 처분을 내린다.
이를 시작으로 이이 나오스케는 히토츠바시파에 대한 옥사를 진행하는데, 이를 안세이 대옥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게 말이 근신이지, 가택연금이나 다름없었다.
미토번의 번사들은 자신들의 주인과 전 주인이 가택연금 당해 물 한모금 제대로 못 받는 상황에 불안해했고,
결국 미토번사들은 조정에 이이 나오스케가 주도하는 옥사를 알리게 되었고,
고메이 덴노는 이 옥사에 대해, 안세이 5개국 조약에 대한 반대와 마쓰다이라 나리아키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는
칙서(무오밀칙)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무오밀칙은 발각되었고, 안세이 대옥은 점차 그 강도와 범위를 확대해간다.
항상 피칠갑을 두르며 도쿠가와군의 선봉장이었던 이이 나오마사의 후손이 바로 나오스케이다.
덴쇼의 붉은 귀신이 있었다면, 이제는 안세이의 붉은 귀신이었던 것이다.
이이 나오스케는 근신 처분의 대상을 확대해 간다.
도사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요도), 우와지마 번주 다테 무네나리, 사쓰마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쿠라번주 겸 로주 홋타 마사요시,
그리고 당연하게도 히토츠바시가문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까지
히토츠바시파는 하나둘 막정에 영구히 완전 배제됨과 함께 근신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전부 다이묘이다 보니 죄를 물어 죽일 수는 없고, 그 대신 실각시킨 것이라 보면 된다.
그러면 그 죄는 다이묘의 실행역이었던 미토번사, 사쓰마번사들이 대신 지면서 사형(혹은 할복)당했고,
겸사겸사 막정에 불만을 품어 반란을 모의했던 조슈번사 요시다 쇼인 역시 체포되어 처형된다.
말이 근신, 가택연금이지, 물이나 식사도 제대로 보급되지 못한채 가택에 감금된 거라고 보면 된다.
비교적 젊은 마쓰다이라 슌가쿠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라면 그나마 버틸 수 있겠지만
60대에 접어든 마쓰다이라 나리아키에게는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다.
마쓰다이라 나리아키는 가택연금 도중 병상에 누웠고, 가택연금 상태에서는 누구도 안으로 들일 수 없기에
나리아키는 적절한 대처를 받지 못하게 되어 결국 가택연금 도중 병으로 사망한다.
그 외에도, 사쓰마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경우 안세이 대옥 당시 사쓰마번에 있었기에
에도막부는 사람을 보내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압송하려 했다.
당연히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이에 저항했고, 군사행동까지 취해 불만을 표하려 했으나
거병 직전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다.
그 즈음 사쓰마번에 콜레라가 유행했지만 안세이 대옥과 시기가 안겹친다는 점,
나리아키라가 죽기 직전까지 정정했다는 점을 들어,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암살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뭐든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여담으로 사쓰마번의 시마즈 가문과 히코네번의 이이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이 나오마사가 시마즈군의 역퇴각에 중상을 입었고, 결국 그 부상으로 죽었다는 것,
그럼에도 이이 나오마사는 사쓰마번과 막부 사이를 중개했다는 점 등등, 피(혈연 아님)로 맺어진 관계이다.
이번에도 이이 나오스케가 시마즈 나리아키라에 옥사를 진행하며 또 한번의 피바람이 분 것이다.
무사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닌 주인을 지키는 것이다.
마쓰다이라 나리아키의 죽음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죽음은 곧, 미토번사와 사쓰마번사가 주인을 지키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무사의 본분을 지키지 못한 무사에게 있어 남은 선택지는 두가지뿐이었다.
죽거나(할복)
원수를 갚거나
1860년 3월 24일(안세이7 음력 3월 3일)
미토번과 사쓰마번을 탈번한 낭인 수십명이 에도성을 나가는 히코네번의 행렬을 사쿠라다문 밖에서 습격한다.
자신들의 주인이었던 마쓰다이라 나리아키와 시마즈 나리아키라에 대한 복수였고,
그렇게 이이 나오스케는 목숨을 잃는다.
이를 사쿠라다몬 밖의 사건(혹은 사쿠라다몬 밖의 사건)이라 한다.
여담으로 이 사건에 대해 밖이라는 위치를 굳이 표기하는 원인 중 하나는
사쿠라다문에서 90m 떨어진 구 경시청 청사 앞에서 일어난
쇼와 7년의 사쿠다라몬 사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봉창 의거'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 사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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