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페리에 의한 개국
사실 당시 일본은 이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상관이 페리의 출항 사실을 전달해줬기 때문도 있지만, 굳이 그게 아니여도
주체가 영국이 되었건, 미국이 되었건, 프랑스가 되었건, 러시아가 되었건, 네덜란드가 되었건,
이양선이 일본 해안에 잊을만 하면 출몰하는 시국에서 정확한 일지는 몰라도 흑선사건이 발생할 건 충분히 예견 가능했다.
게다가 이게 뭐 단기간에 있던 것도 아니고, 레자노프 사건이 1804년(분카1)이니, 대충 50년은 있다고 봐도 충분하다.
근데 왜 대비를 못했냐? 왜 막상 페리가 내항했을 때 아무 것도 못할 수 밖에 없었냐?
이유는 간단하다. 주구장창 이야기하지만 50년 내내
에도 막부가 돈이 없었다.
구미 세계의 접근을 막기 위한 대비책의 필요성은 실감했지만, 이게 당장 목에 칼 들어온 수준은 아니었다.
대기근, 대지진, 대화재, 부정부패, 번의 몰락과 탈번 낭인의 급증, 낭인으로 인한 사회 혼란 등등
이런 게 심각하니 서양따위 고민할 여지조차 없던 것이었다.
그런데 저 중 그 어떤 거 하나라도 해결되면 모르겠는데, 막말전사에서 언급했듯 결과는 항상 실패였다.
그러면 좀 단적으로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것이다.
"와 막부 엄청 무능했네."
"지방도 망하고 중앙도 망하고 일본 저 때 아예 망한 거 아닌가?"
우선 막부는 엄청 무능했다.
아게치령만 봐도 막부 살리겠다고 가뜩이나 죽어가는 지방 번들 땅 뺏는 것 밖에 안되었고,
덴포 대기근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을 생각하면 에도 막부의 시스템 자체가 수명을 다한 느낌도 강했다.
이정도면 그냥 에도 막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체제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일 지경이다.
근데 어떻게?
지방도 망했고 중앙도 망했다. 근데 왜 일본은 안 망했지?
정확히 말하면 망하지 않은 지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가번은 여전히 일본 최대의 번으로 그 명망을 유지했고,
미토번, 히코네번, 후쿠이번, 도사번, 사쓰마번은 번정개혁에 성공해 오히려 성장세가 우상향하던 상황이었다.
그 외에도 번사들이 유능한 편이었던 조슈번, 다이묘가 유능한 편이라는 우와지마번 등적어도 다 망한 건 아니었다.
그러면 왜 저 번들은 개혁에 성공한 반면, 다른 번이나 에도 막부는 개혁에 실패했을까?
전통시대 일본은 법적으로는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직업 개념을 기반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가 암묵적으로 존재했다.
황족과 공가, 무가(신판-후다이-도자마/고케닌-하타모토 등등등), 승려, 상인, 농민, 장인, 게이샤, 백정,
이 중 으뜸은 단연 사무라이였고, 무가 내에서의 서열은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즉 에도시대 제1의 번이라 불린 가가번의 마에다 가문, 번정 개혁의 성공한 사쓰마번 시마즈 가문이라고 해봤자
도자마(外樣)이니 막정에 깊게 참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번정개혁의 성공에 큰 기여를 한 인사들 중 막정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 두 명 빼고 말이다.
미토번(고산케) 마쓰다이라 나리아키, 히코네번(후다이) 이이 나오스케.
이 둘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되니 생략하고 사상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겠다.
막정은 실패를 거듭하는데, 막부 주요 사업에는 번의 인력이 강제 동원된다. 그리고 실패하면 번사는 할복해야한다.
불가능한 사업같아 보여도 막부가 시키면 해야한다. 물론 인력 손실은 물론 실패의 책임도 번이 졌다.
부정부패는 관망 밖에 안하고 있으니 막부의 무능함은 뚜렷해져만 갔다.
결국 지방을 중심으로 막부 타도의 의견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중심으로 하여 막부를 타도해야 하는가?
결론만 말하자면, 덴노(天皇)이었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영향이라고 보면 되겠다.
여기에 더해 국학의 영향으로 일본스러움, 일본다움에 대한 해석이 진행되며
신 진무덴노의 만세일계로 내려온 덴노는 곧 새로운 시대를 위한 지도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이를 '존황사상'이라고 한다.
한편 이양선의 잦은 출몰로 구미세계는 곧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판단되었다.
여기에 더해 난학의 영향으로 일본은 그나마 동아시아 국가 중 유럽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막부에 대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국학의 영향으로 '일본스러움'의 적으로 구미세계가 설정되기 시작했고, 이양선의 출몰이 그 증거가 되어줬다.
이를 '양이사상'이라고 한다.
이런 건 사실 일본 만의 것은 아니었다.
양이야 동아시아가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니고,
존황도 고려말의 반 무신정권 환도운동과 비슷한 궤라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만 막부의 무능에 반 서양사상이 결합되면서,
막부를 무너트리기 위한 양이, 구미세계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도막(倒幕),
이런 식의 사상 결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존황양이 사상의 탄생이었다.
가에이 6년 6월 3일(양력 1853년 7월 8일), 구미세계의 위협은 구체화되었고,
이에 대한 막부의 대처는 최선이라고 하지만 많이 부족했고, 모든 계층의 실망을 낳았다.
다양한 계층은 막부의 체제를 비판했고, 다양한 계층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공의여론(公議輿論)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개국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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