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양이에 미친 젊은 덴노가 있습니다.
과연 양이에 미친 건 이 사람뿐이었을까요?
1862년(만엔2) 미국 공사관의 통역관으로 일하던 헨리 휴스켄이 사쓰마번사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자국민이 피해를 입은 것이니 미국은 항의하고, 결국 막부는 배상하는
이런 식의 일이 상당히 비일비재했다.
여기서 개념어를 하나 소개하자면
막말유신기부터 2차대전기까지의 암살사건들에 대해 보통 암살이 아닌,
천주(天誅てんちゅう)라고 표현하곤 한다.
'하늘의 뜻(天)에 따라 벌 준다(誅)'는 뜻으로 천벌과 같은 뜻의 단어이다.
암살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합리화를 곁들인
보통 낭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전통시대 일본은 다른 번 혹은 국으로 이동하려면 번의 허가가 필요했고,
불순한 의도가 섞였으면 정치적 이유로 통행을 보증해주지 않았으니 천주니 의거니 하고 싶으면 탈번을 해야했다.
여담으로 흑선이 보고 싶었던 요시다 쇼인도 탈번해서 에도로 간 것이었다.
사쿠라다몬 밖의 사건, 사카시타몬 밖의 사건 등은 전부 분류하기는 암살사건이지만,
특별히 막말변혁기에 일어난 수많은 암살 및 암살 미수 사건은 조금 특별하게 말하기 위해
'천주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860(만엔1) 도사번의 존황양이파 무사들은 도사번주 야마우치 요도를 호위하고 지지함과 동시에,
번주에게 좌막의 간언(奸言)을 하는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도사근왕당을 조직한다.
도사근왕당의 리더는 다케치 한페이타였고,
신센구미로 유명한 히토기리 오카다 이조, 삿초동맹으로 유명한 사카모토 료마가 여기 소속되어 있었다.
기묘하네.
도사근왕당은 도사번의 좌막파를 천주했고,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오카다 이조에 의해 요시다 도요가 죽은 사건이겠다.
예상이 가능하겠지만 선두 주자는 바로 미토번이었다.
미토번을 탈번한 낭인들은 1861년(분큐1) 에도의 영국 공사관으로 쓰이던 도젠지를 습격했다.(1차 도젠지 사건)
러더포드 올콕 주일 영국공사가 습격당했고,
이 사건으로 에도막부는 배상금은 물론 공사 수비 주둔군까지 허용해야만 했다.
올콕 공사는 막부의 호위를 불신하며 결국 공사를 요코하마를 이전했는데,
올콕 공사가 귀국한 사이 영국 공사관이 도젠지로 다시 복귀했고,
공사관을 수비하던 병사가 낭인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2차 도젠지 사건)
가뜩이나 당시 상락을 위해 바쁘던 막부에게 이런 일이 터지니 정신이 없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다음에 언급할 나마무기 사건까지 터진다.
존황양이파 무사들은 각계 인사와 외국인들을 위협했고, 그들은 의사표현의 방법으로 암살을 자행했다.
천주만을 목적으로 한 덴추구미는 야마토국에서 거병했고,
교토에서 도막의 기치를 보이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의 세 쇼군(다카우지, 요시아키라, 요시미츠)의 목상을 효수하는
아시카가 쇼군 목상 효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864년(겐지1) 교토에서 덴구토(天狗党)가 거병하기도 했다.
존황양이파만 천주를 자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이 나오스케가 죽은 후 히코네번과 미토번은 원수지간이 되었고, 히코네번사들이 미토번사를 습격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런 사건은 보통 다이묘들과 번사들이 모여있던, 그리고 정치의 중심이었던 에도와 교토에서 자행되었다.
그렇게 에도와 교토의 치안은 개판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정국에서 교토수호직에 있던 좌막파 다이묘, 아이즈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1864년 교토 수호를 위한 군사조직을 설치하니, 이것이 바로 교토 미마와리구미(見廻組)이다.
한편 1863년(분큐3) 좌막파 무사들을 중심으로 한 신센구미(新選組)가 조직되었다.
1864년 신센구미 교토의 이케다야에서 존황양이파를 급습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게 중용된다.
그렇게 교토는 신센구미와 교토 미마와리구미, 두 좌막파 군사집단과 존황양이파 무사들이 대립하는
굉장히 무거운 도시로 변하게 된다.
1861년부터 1864년까지 정확히 말하면 1차 조슈정벌 이전까지 모든 사건은
정말 평행하게, 그리고 군발적이고 다양하게 일어났다.
잠시 중앙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이전으로 돌아가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의 이야기를 해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