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마(薩摩). 에도에서 가장 먼 번으로 지금의 가고시마현 일대를 의미한다.
이 지역의 다이묘 가문은 시마즈(島津)이며
가마쿠라 막부때 휴우가(지금의 미야자키현), 사쓰마, 오스미 제도를 관할하는 슈고에 임명되어
에도시대까지 사쓰마번주를 유지했다.
전국시대 말에는 다른 다이묘 가문은 형제끼리 싸우고 부자 간에 하극상이 일어나는 개판인 와중에도
시마즈 가문은 똑똑한 아들 넷이 사이도 좋고 능력도 좋아,
이를 기반으로 규슈 남부 전 지역을 넘어 규슈의 패자를 넘보기도 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입하면서 규슈 통일에 실패했고, 결국 도요토미에게 항복하였다.
임진왜란의 노량해전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두차례의 전진철수를 감행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바로 대표적인 사쓰마번주라고 할 수 있다.
전진철수로 인해 부상을 입은 이이 나오마사의 중재로 사쓰마번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은퇴를 전제로 영지를 보전했으나
문제 저 두번의 전쟁에 번의 재정을 전부 소진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단 류큐를 정벌해 류큐로부터 조공을 받는 것으로 일단 해결은 했으나,
호레키 치수 사업에서의 책임 등, 막부로부터 짬이란 짬은 다 맞았고, 전국적인 재난 피해도 피해갈 수 없었다.
1830년(분세이3) 사쓰마번은 즈쇼 히로사토를 발탁해 번정을 개혁했고,
이 즈음부터 사탕수수 농업이 흑자로 전환되면서 번의 재정이 회복되었다.
원래도 나가사키와 가까워 상업이나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던 사쓰마는
번정 회복을 계기로 서양식 무기를 구매해 번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안세이 대옥으로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죽은 이후 번주에 오른 것은 조카인 시마즈 다다요시였다.
이것은 시마즈 가문이 번주를 일찍 물려주는 전통이 있어서 그랬을 뿐
번의 실세는 다다요시의 아버지이자 나리아키라의 이복동생인 시마즈 히사미츠가 장악하게 되었다.
난벽에 히토츠바시파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달리 시마즈 히사미츠는 공무합체론에 가담했고,
이를 위해 나리아키라파의 주요 번사들을 파직시킨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앞으로 주구장창 이야기해야 할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시마즈 히사미츠는 중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길 바랬고, 이를 위해 공가 및 조정과 손을 잡는 선택을 했다.
1862년(분큐2) 공무합체의 선봉이 되고자 한 사쓰마번은 교토의 여관 데라다야에 결집한 존황양이파를 습격한다.
참고로 이들은 전부 사쓰마번사로, 데라다야 사건에서 생존한 존황양이파도 번에 의해 근선처분을 받게 된다.
(ex: 사이고 주도)
아군까지 제거할 수 있는 그 모습에 결국 사쓰마번의 막부의 신임을 크게 사게 되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의 후견인 직을 물려받았고,
겸사겸사 오하라 시게노리와 함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쇼군후견직으로하는 건백서를 막부에 제출하면서
분큐의 개혁을 주도해간다.
이러는 당시 막부 내에서의 히사미츠의 직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의 후견인이자 사쓰마번의 실권자인 도자마 다이묘에 불과했지만
그가 꿈꾼대로 정권이 손에 들어온 것이다.
쇼군의 상락, 도젠지 사건, 분큐의 개혁 등으로 정신이 없던 1862년(분큐2)
영국인 관광객 4인은 개항장 요코하마의 나마무기에서 에도로 향하던 사쓰마번 행렬을 마주한다.
그들은 일본어도 할 줄 몰랐고, 일본식 신분제에 대한 이해도도 없는 상태였기에, 사쓰마 행렬에 예를 표하지 않았다.
이런 무례를 범했으니 사쓰마번사들은 그 네명의 영국인에게 칼을 휘두르게 된다.
세명은 그래도 잘 도망쳐 살아남았으나 한명은 결국 사망하고 만다. 이를 나마무기 사건이라고 한다.
도망친 영국인 여성이 이 사실을 영국 공사관에 전했고, 영국은 막부와 사쓰마번에 배상금과 사과를 요구한다.
게다가 영국은 영국인을 살해한 무사의 신변까지 요구했고 결국 사쓰마는 이를 무시했다.
그렇게 영국은 1863년(분큐3) 사쓰마번에 선전포고한다.(사쓰에이 전쟁)
이 당시 애초에 영국이 원했던 것은 배상금이었기에,
가고시마만에서 포 몇번 날라가면 흑선사건이 그랬듯 쫄아서 수그리리라 생각했지만,
사쓰마는 그 어떤 번보다도 서양식 대포와 함선 도입에 적극적이고 성공적이었던 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길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사쓰마 함선이 불타고 가고시마성 내에 포격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지만
영국이라고 해서 7척의 함대로 적을 제압하는 건 여력이 안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석탄과 탄환이 고갈된 영국군은 요코하마로 퇴각한다. 누구랑 달리 점령은 안당한 것이다.
세 달 후 막부의 중재 아래 사쓰마번과 영국 간의 강화협상이 진행되었으며,
피의자는 도망가서 잡을 수 없고 사쓰마번이 25000파운드의 배상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결과는 사쓰마번의 입장을 180도 전환시킨다.
막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어했던 시마즈 히사미츠는 오히려 막부가 방해된다고 판단했고,
번의 생존을 위해서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사쓰마는 존황양이의를 번의 기치로 설정했고, 양이파의 아이돌 사이고 다카모리를 번정의 핵심으로 배치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사쓰마번이 후견인으로 지켜주었고 사쓰마번이 작정하고 지원해주었던 막정 핵심 인사는
이러한 사쓰마번의 입장에 대해 그렇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