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쇼군도 바뀌었고, 사람도 많이 죽었으며, 대내외적인 큰 사건들이 있었으니
분위기 전환 겸 연호가 만엔(万延)으로 바뀐다.
좋은 일이 길이길이 이어지길 바라는 연호지만, 연호자체는 오래 쓰이지 못했다.
이이 나오스케가 죽었다는 건 이래저래 막부의 입장에서는 큰 위기였다.
도쿠가와 이에모치(요시토미)가 쇼군에 오른 후 막정은 난키파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난키파의 핵심인 이이 나오스케가 하루아침에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일단 막정은 이이 나오스케의 휘하에 있던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와
안세이 대옥에 항의했다가 파면되었던 구제 히로치카(久世広周)가 주도한다.
안도와 구제는 우선 안세이 대옥으로 파면되었던 히토츠바시파를 대거 복권시키기 시작한다.
마쓰다이라 슌가쿠, 야마우치 요도, 시마즈 히사미츠, 홋타 마사요시,
그리고 이이 나오스케가 그렇게 실각시키고자 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까지 말이다.
당시 일본은 대내적으로 정말 정신이 없었다.
존황양이지사들은 개항자의 외국인과 외국인에게 협력하는 일본인(예를 들어 통역관)을 습격했고,
심지어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방화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에도막부는 배상을 해야했고, 겸사겸사 영사재판권으로 사법적 권리는 제대로 침해당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상황을 안정시키려면 실추된 막부의 입지부터 회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당시 막부는 조정 관료들에 대해 갑갑해하며 친정을 하던 고메이 덴노에게 접근했고,
이 참에 막부를 자신의 친정에 필요한 군사조직으로 부리고 싶어한 고메이 덴노와 막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조정은 어린 이에모치 쇼군의 혼처로 가즈노미야 지카코 친왕(고메이 덴노의 이복여동생)을 추천하게 된다.
막부와 조정의 정략결혼이 성사된 것이었다.
조정(公)과 막부(武)가 힘을 합치는(合体) 공무합체론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결혼을 계기로 연호는 교양있는 것(文)이 오래가기를(久) 바라는
분큐(文久)로 바뀐다.
이러한 행보는 존황양이 지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 막부는 무너져야하고, 주자학적 근거에 의해 그 수장을 덴노로 지정했는데
오히려 덴노가 막부와 힘을 합친다는 것은 그들의 논리를 제대로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불만은 막부로 향했고, 존황양이파 미토번사들에게 안도 노부마사가 습격당했다.(사카시타몬 밖의 사건)
다행히 안도 노부마사는 이이 나오스케와 달리 생존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안도 노부마사와 구제 히로치카는 막정에서 물러나야 했다.
1862년(분큐2) 에도에 입성한 시마즈 히사미츠는 막정을 장악하기 위해
조정의 칙사인 오하라 시게노리와 함께 막부에 의견서를 제출해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와 마쓰다이라 슌가쿠를 막정의 중심에 배치시키는 '요시노부-요시나가 정권'을 수립시킨다.
이어 교토수호직을 설치하고 막부의 군사조직을 개편하는 개혁이 진행되었다.(분큐의 개혁)
여기에 더해 덴노가 백년 넘게 황거 밖을 나가지 않던 것을 끝내고
고메이 덴노가 신사 참배를 위해 외부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민중들은 신으로만 알고 있던 전설적인 존재인 덴노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그렇게 조정의 권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네비의 무연고 묘지를 진무덴노릉으로 비정해 고메이 덴노가 행차하기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무려 229년만에 상락하여 고메이 덴노를 알현하기도 했다.
229년만에 만난 쇼군에게 덴노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했다.
막부는 양이를 실행하고 양이전쟁을 준비하라
어떻게요?
젊은 덴노가 미친 것이 분명했다.
고메이 덴노는 젊은 혈기로 막부를 이용해 서양과 전쟁할 생각뿐이고,
이에모치 쇼군도 젊은 혈기로 조정을 등에 업어 막부의 권위만 회복할 생각이었다.
이미 결성되는 그 순간부터 동상이몽을 꾸는 상태였고, 그렇기에 실패는 기정사실이었던 것이다.
한편 막부 내의 끊임없는 견제로 결국 요시노부-요시나가 정권은 붕괴되고,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막정이 개편된다.
이제 일본은 공무합체론과 막부 존속을 지지하는 좌막파(佐幕派)와
존황양이론과 막부 토벌을 주장하는 도막파(倒幕派 혹은 토막파討幕派)로 양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