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슈 최서단의 번 나가토(長門), 지금의 야마구치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편의상의 명칭인 조슈(長州)라는 이름으로 보통 불렸다.
다이묘 가문은 이쓰쿠시마 전투 이후 주고쿠의 패자가 되었던 모리 가문이다.
모리 데루모토는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원이었고, 무로마치 막부가 축출되자 요시아키 쇼군을 보호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에도 2인자의 자리를 명확히 지켰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으로 참여해야 했던 탓에 이후 영지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으며,
그 대신 나가토국의 다이묘로 생존하게 된다.
중앙과는 거리를 좀 두었고, 요시다 쇼인 등 유능한 인사들을 기반으로 번정을 운영했다.
그리고 요시다 쇼인 사후에는 쇼인에게 수학했던
가츠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그리고 저 셋의 영향을 받은 다음 세대 포지션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노기 마레스케, 미우라 고로 등등
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를 생각하면 인재풀이 미치긴 미쳤다.
다만 저들이 전부 '젊은 존황양이 지사'였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적극적인 실행론을 주장했던 쇼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라
전반적으로 행동 하나하나가 강경했다.
1862년(분큐2) 다카스기 신사쿠가 주도한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교토에서 존황양이파는 곧 조슈번사를, 조슈번사는 곧 존황양이파를 의미했다.
문제는 교토엔 신센구미와 교토 미마와리구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뭐만 하면 도망다녔고, 이케다야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조슈번사들이 거병했다가 패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구사카 겐즈이가 죽었다. 그래서 구사카는 친우인 다카스기에 비해 역사적 존재감이 적다.
존황양이를 위해 천주를 행하건 뭐를 행하건 일단 군사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낀 다카스기 신사쿠는
자신을 따르는 무사들을 결집한 기헤이타이(騎兵隊)를 창립했다.
참고로 이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의 앞에 나선 사무라이 바로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조슈출신 정치인
존황양이의 기치가 높았다는 것은 그들의 공격대상이 좌막파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예상할 수 있겠다.
다카스기, 구사카, 이토, 이노우에 등등이 참여한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에서 예상 가능하듯,
조슈번사들은 서양에 대해 상당히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애초에 조슈번 역시 사쓰마번이 그랬던 것처럼 서양식 군제를 도입하고 해안포대를 대거 설치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쓴 번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조슈는 서양 상선이 보이면 일단 포격을 갈겼다.
미쳤지 미쳤어.
결국 1863년(분큐3) 미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공격했고,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상륙을 허가하고 포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전쟁에 있어 가장 큰 손해는 조슈번의 정치적 입지에서 나타났다.
당시 조정의 존황양이파 관료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상황이었는데, 조슈번의 섣부른 행동으로 전쟁이 일어나 패배했다.
즉 조슈번은 더이상 명분론에서 내세울 게 없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대세는 공무합체론을 기반으로 한 양이전쟁의 준비로 전환되었고,
조슈는 이 상황을 타계할 최악의 선택을 하는데, 바로 간몬 해협을 폐쇄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더해 8.18정변 이야기도 해야하지만 이건 조슈 정벌 이야기할 때 하는 게 좋을 듯 하다.)
아니 미친놈들아 거기를 막으면 요코하마까지 겨우겨우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서양애들이 가만히 있겠니?
결국 1864년(겐지1)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4개국의 군대가 시모노세키를 공격했고, 조슈는 탈탈 털리게 된다.
4개국과의 강화회담에 조슈 대표로 다카스기 신사쿠가 참여했으며,
그간 강경하게 존황양이를 외치던 다카스기는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급진적인 양이는 패배할 뿐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결국 조슈번은 서양이 원하는대로 배상금을 내고, 시모노세키를 개항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당시 조슈는 배상금 낼 여력이 안되어 배상금은 막부가 짬을 맞게 되었고,
시모노세키가 개항되어 오히려 조슈의 번정은 개선되는 효과를 맞이했다.
대신 조슈번의 번정에서 존황양이파는 전쟁의 책임을 져야했다.
번정에서 완전히 밀려나 실각했고, 조슈번은 좌막파의 노선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다만 그 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조슈 정벌을 선언했고, 좌막파의 주장이 틀렸다는 걸 막부가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
시모노세키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어 기헤이타이는 고잔지에서 거병했고
좌막파 조슈번사들을 실각시키고 제거하며 다시 한번 번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다카스기 신사쿠가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조정의 적으로 낙인 찍힌 조슈가 구원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의 조슈의 편이었다.
막부의 군대만 조슈로 향한 것이 아닌, 도사번을 나온 낭인 한명도 조슈를 향해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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