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간을 돌려 분큐 연간으로 돌아가보자.
조슈는 조슈대로, 사쓰마는 사쓰마대로 꼬장을 부리고 있고,
젊은 고메이 덴노는 막부를 자기 손으로 부리려 하고 있고,
젊은 이에모치 쇼군은 조정을 자신과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에만 쓰고 있다.
그 와중에 천주사건은 끊이지 않고, 조정은 좌막파와 도막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의 중신으로 일하며 조정과 막부 사이를 중개하던 인물이 누구였냐?
바로 쇼군 후계자로도 언급되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이다.
1862년(분큐2) 고메이 덴노는 자신의 위엄을 알리고, 이를 기반으로 막부를 이용해 전쟁할 생각뿐이었으며,
이에 대해 조정 내의 존황양이파는 큰 불만을 가졌다.
결국 산조 사네토미와 아네가토시 긴사토는 양위를 건백했고,
이건 당연히 고메이 덴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다.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조슈와 존황양이파의 입지가 흔들리자 고메이 덴노는 곧바로 존황양이파에 대한 처벌을 명령했다.
이 당시 아네가토시 긴사토가 암살당하는 천주사건(사쿠헤이몬 사건)이 발생했고,
고메이 덴노는 이 사건을 빌미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에게 명령하여 교토에서 존황양이파를 추방하게 한다.
1863년(분큐3) 음력 8월 18일, 사쓰마번과 아이즈번의 무사들이 동원되어 교토의 존황양이파들은 죽거나 추방당했고,
수많은 조슈번사들이 죽었고, 갈 곳이 없어지니 일단 조슈번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산조 사네토미 등의 7명의 조정 관료도 실각했고, 조정의 업무에서 완전히 추방당했다.
이를 분큐의 정변 혹은 8.18 정변이라고 한다.
1864년(겐지1)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는 막부와 조정 양쪽의 눈치를 보며 중재만 하느니, 아예 교토에 눌러 앉아버린다.
교토수비총감으로 직책을 옮겼고, 뜻을 같이하는 좌막파 다이묘
교토수호직의 아이즈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교토소사대의 누마타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를 중심으로 정권이 개편된다.
이를 저 세명의 가문과 영지에서 한글자씩 따와 이치카이소(一会桑) 정권이라고 부른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막부의 밖에서 공무합체론을 이용해 막부를 지지하는 역할을 해주었고,
교토를 좌막파의 수도로 만들어버렸다.
근데 이렇게 정국이 흘러가니 애매해진 건 사쓰마였다.
사쓰마번은 사쓰에이 전쟁 이후 존황양이로 노선을 바꿨고, 이를 위해 자신들과 가깝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에 기대했는데,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는 존황양이에 호응해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 와중에 존황양이파인 사쿠마 쇼잔을 발탁해 공무합체론에 활용하는 등, 존황양이파를 와해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한편 교토에서 추방당한 존황양이지사들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와 좌막파에 대한 반감으로,
이를 보복하기 위한 천주를 계획하게 된다.
퇴근하는 좌막파 공경들이 하마구리고몬(蛤御門)에서 나올 때를 노려 그들을 습격했고,
뒤이어 나오는 사쓰마군과 아이즈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교토에 불을 질렀다.
오닌의 난 이후 교토는 몇백년만에 전투로 불바다가 되었고, 결국 사쓰마와 아이즈의 군사들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를 금문의 변이라고 한다.
8.18 정변에 이어 금문의 변에서도 격돌한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은 결국 철천지원수지간이 되었고,
교토에 불을 지르고 공경들을 공격한 조슈번에 대해 고메이 덴노는 조적(朝敵)이라며 공격을 명하였다.
물론 막부에 말이다.
조슈번의 눈 앞에는 이제 막부가 이끄는 모든 번의 군대가 서있었다.
애초에 시모노세키 전쟁, 8.18 정변, 금문의 변 모두 패배한 조슈의 군대에게 막부군은 이길 수가 없는 존재였으나,
이 당시 예산이나 여건 상 사쓰마를 제외하면 조슈와 싸울 이유가 없는 군대였고,
그런 군대에게 돈과 지원도 부실하니 막상 전쟁터에서는 싸울 명분이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정벌군 총사령관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주 도쿠가와 요시카츠,
사쓰마군 사령관 사이고 다카모리
모두 존황양이파이다.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의 주도 하에 조슈와 막부 간의 강화협상이 진행된다.
대충 다카스기 신사쿠 등 존황양이파와 금문의 변 책임자를 막부로 압송한다는 조건이었고,
바로 다카스기 신사쿠는 런을 친다.
그렇게 1차 조슈정벌은 끝이 난다.
그렇게 조슈번은 좌막파가 장악하게 되지만
다카스기 신사쿠가 기헤이타이를 이끌고 고잔지에서 거병하면서 바로 조슈번 정상화 크악!
'좌막파 척결' 다섯 글자에 환호성
덴노는 어린놈이 꼬장이나 부리고, 막부군은 현장에서 싸우기 싫어하는데
우리 실권자 요시노부씨는 무얼하고 있던 것일까?
사실 현장에서 싸우기는 했다. 조슈 밖에 있는 조슈군과 싸웠을뿐, 조슈로 안갔던 게 문제였겠다.
게다가 군대가 필요한 상황은 조슈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미토번에서 다케다 고운사이를 중심으로 한 덴구토(天狗党)가 반란을 일으켰고,
덴구토의 진군은 에도를 향해 내려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요시노부는 이 미토번의 핏줄이다.
즉 이거 못막으면 요시노부의 입지도 위헙해졌다.
비록 1차 조슈정벌은 수확 없이 끝났지만 덴구토는 막아냈다.
1865년(게이오1)
교토 바로 앞에 있는 효고항(고베)이 안세이 5개국 조약에 의해 개항되어야 하는데,
고메이 덴노는 이를 작정하고 거부하니 서양 5개국의 군대가 오사카만에 집결했다.
요코하마 개항장 폐지를 논의할 때부터 나왔던 서양의 불만이 폭발한 순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조정의 입장은 여전히 강경했다.
조슈의 지원을 받던 공경들이 실각하고 그 자리를 채운 인사들은 전부 사쓰마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안세이 5개국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다.
조정회의에서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는 칙허가 내려오지 않을 시 할복하겠다고 협박했고,
결국 고메이 덴노도 칙허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대신 효고항 개항은 거부되었다.
에초에 1865년(겐지2-게이오1) 즈음이 되면 고메이 덴노에 대한 공경들의 지지는 끝없이 추락한 상태였다.
공경들은 존황양이파인 이와쿠라 도모미를 중심으로 집결해있었고,
막부나 조정이나 과한 요구만 반복하는 덴노에 대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무시하던 상태였다.
이걸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모를 리가 없었고, 이에모치 쇼군 역시 조정 말 들어주는 척 하면서 실리만 노리던 상태였다.
애초에 서양과의 대화나 군사행동에 있어 조정은 실권이 없기 때문이었다.
공(公)과 무(武)가 힘을 합쳐야 이루어질 공무합체론이지만 서로 이용할 생각뿐이었으니 이제 그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중간에서 중재를 하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는 거의 독자적인 행동을 했다.
막부는 압박하고 조정은 꼬장 부리는데 누구 말을 듣든 의미는 없었다.
아이즈, 누마타 등 좌막의 기치를 택한 번이 많으며, 무엇보다 사쓰마번이 자신의 후견인이었기에,
막부를 수호하고 유지한다는 목표 하나만을 가지고 정책을 운용하려는 심산이었다.
교토는 금문의 변 이후 존황양이파가 접근할 수도 없으며,
1865년(게이오1)에 조정 내의 존황양이파(산조 사네토미, 이와쿠라 도모미)등은 칩거 처분 혹은 실각한 상태였으니
일단 현상유지를 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보였다.
사쓰마번이 요시노부가 알던대로 좌막의 기치를 유지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