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막파에 비교했을 때 도막파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중심을 잡아줄 인물의 부재였다.
좌막파에는 신센구미와 교토 미마와리구미를 지원하고 지지했던 아이즈번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막부와 조정을 중개하며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
그 누구보다 막부 수호의 의지는 강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등이 있었던 반면,
도막파는 안세이 대옥과 덴구토의 난으로 미토번이 좌막파로 전향했고,
난벽 다이묘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후 사쓰마번은 공무합체론의 선봉처럼 활동했다.
도사번은 번 내 여론이 좌막과 도막으로 양분되어 이에 따른 혼란도 있었고,
조슈번은 결국 조정의 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도막파의 승리로 이어지기에
도막파의 중심 역할을 해준 그 인물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도사번 출신 하급무사로 도사근왕당에서 활동한 존황양이지사이다.
하급무사이다 보니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기록이 애매하지만,
1862년(분큐2) 도사근왕당을 탈퇴하고 탈번했다.
이후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추천으로 가쓰 가이슈 밑에서 수학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사실 관계가 상당히 불분명하지만, 일단 료마가 가쓰 가이슈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 분명하다.
가쓰 가이슈와 함께 고베 해군견습소 등에서 활동했으며,
1865년(게이오1)고베 견습소가 페지된 후에는 나가사키로 이동해 활동하게 되었다.
그 해에 가메야마 사츄를 설립했고, 이는 이후 친우인 나가오카 신타로에게 이양되어 해원대로 개칭된다.
해원대는 이후 고토 쇼지로를 거쳐 이와사키 야타로가 이어받았고, 이후 개명하여 지금의 미쓰비시 그룹이 되었다.
나가사키로 이동한 료마는 다양한 인사와 교류했다.
그 중에는 이전부터 료마를 지원해준 도사번의 상급무사 고토 쇼지로,
서양인 자본가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
이전에도 막역했던 도사번 출신의 낭인 나가오카 신타로, 조슈번사 다카스기 신사쿠와 가츠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
그리고 사쓰마번사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있었다.
당시 사쓰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사쓰마와 조슈 모두 재정 문제를 안고 있었고,
동시에 양번 모두 존황양이의 기치를 따르는 상태였다.
따라서 존황양이론자 사카모토 료마의 시각에서 군사력이 뛰어난 두 번이 힘을 합쳐,
양번이 직면한 정치적, 경제정 문제를 해결하면 막부 타도의 실현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문제는 8.18정변이래 조슈와 사쓰마는 철전지원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번의 번사들과 교류하던 사카모토 료마와 나가오카 신타로가
그 중재역으로 유이하게 가능했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우선 료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 교류하여 삿쵸 간 동맹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에게도 이러한 내용을 설득했고,
이들은 각 번의 중신이었기에 번정의 주역들에게도 료마의 동맹 제안이 전달된다.
당시 1차 조슈 정벌이 끝난 지 얼마 안되었고, 조슈의 입장에서는 동맹이 간절하지만
철천지원수인 사쓰마의 밑으로 들어가는 형국으로 보여 동맹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그러자 조슈번의 지원을 받는 낭인이자 1차 조슈 정벌에 조슈측으로 참전했던 나가오카 신타로가 조슈로 이동했고,
결국 조슈는 료마의 제안을 수락하게 되었다.
사쓰마를 설득하는 데에는 복잡한 과정이 걸리지 않았다.
사카모토 료마를 지지하고 지원해준 번 중 하나가 사쓰마였고,
사쓰에이 전쟁 이후의 협상이나 영국관계를 주도햇던 고마쓰 다테와키가 료마의 동맹안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료마의 중재 하에 시모노세키에서 삿쵸 양번의 첫 협상이 시작되기로 했는데,
아니 여기서 사쓰마측의 대표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갑자기 교토로 이동하여 노쇼를 해버린다.
삿쵸의 비밀 접촉에 방해가 된 것은 조정과 막부였는데,
1866년(게이오2) 조정은 두번째 조슈 정벌을 결의했고, 조정 내의 반대와 막부의 심드렁한 반응에도
젊은 고메이 덴노는 고집을 끝까지 꺾지 않았다. 결국 막부는 2차 조슈 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교토에 체류 중이던 오쿠보 도시미치에 의해 사이고에게 전해졌고,
사이고는 급히 교토로 이동해 조정에 대한 정치공작을 펼쳐 조슈 정벌을 일단 지연시켰다.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조슈에 전해질 수가 없었고, 그럴 시간도 안되었으니
조슈의 입장에서는 그냥 노쇼일 뿐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파악한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번의 이름으로 총포와 도검류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추후 조슈를 지원하기 위해 사쓰마가 공을 들이는 것으로 포장해
조슈의 분노를 달랬다.
사이고 다카모리도 구로다 기요타카를 조슈에 파견해 일련의 사실을 알렸고,
삿쵸 양번은 재협상을 약속하게 되었다.
몇달 후 교토의 고마츠 다케와키 저택에 삿쵸 양번의 주요 인사가 모였다.
사쓰마 대표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포함해 6인이 모였고,
조슈 대표에는 기도 다카요시가 참여했다.
당연히 중재역은 사카모토 료마가 담당했고, 삿쵸 동맹이 체결된다.
원래 이 맹약은 밀약이기에 약조의 내용을 문서화하지 않으려 했는데,
조정의 적으로 낙인 찍힌 조슈가 보증의 역할로 이를 문서화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 밀약의 보증서 같은 문서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그 덕에 내용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대충 내용은 삿쵸 양번은 군사적으로 협력하며, 사쓰마는 향후 조슈의 사면을 제기하고 이를 위해 힘쓸 것을 약속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당시에 외부에 알려졌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하지만 사이고, 오쿠보 등 존황양이 인사는 물론 기도, 사카모토 같은 신센구미와 교토 미마와리구미의 1순위 타겟이 움직이니
좌막파에서도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경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삿쵸 동맹이 체결된 다음날, 교토의 데라다야(사쓰마번의 존황양이지사들이 습격당한 그 곳)에 머물던 사카모토 료마는
신센구미로 추정되는(설임)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아 도망치게 되고,
이후 숨어지내다가 해원대원 무쓰 무네미쓰의 알선으로, 죽을 때까지 보금자리로 할 오미야로 이동했다.
이후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번주 야마우치 요도로부터 탈번의 죄를 사면받아 번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참고로 자세히 적으면 길어져 생략했는데, 료마는 무려 탈번을 두번이나 했다. 그래서 사면도 무려 두번.
삿쵸가 동맹을 맺었으니, 그 다음은 이 동맹의 세력을 키워야했고,
효고항 개항 논란으로 중앙에 정신없는 틈을 타 료마는 사쓰마와 도사 간의 동맹을 중계했다.
사쓰도 맹약이 체결되며 조슈-사쓰마-도사로 이어지는 도막연합이 탄생했고,
그들의 군사력과 체제는 막부를 상대할만함이 2차 조슈정벌로 증명되었다.
1867년(게이오3) 대정봉환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사카모토 료마는
대정봉환의 건백을 위해 야마우치 요도를 만나러 고토 쇼지로와 함께 교토로 이동한다.
교토로 이동하는 배에서 료마는 고토에게 구체적인 안을 공개하는데, 이것이 바로 선중팔책이다.
참고로 이 선중팔책의 내용은 전부 설이다. 선중팔책의 실재 자체가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대정봉환과 이후의 신정부를 구상하는 큰 그림은 사카모토 료마가 제시한 안대로 간 것이 확실하다.
대정봉환 직후 사카모토 료마는 선중팔책을 구체화하여 정책의 방향성으로 하는
신정부강령팔책을 작성해 각번의 실력자에게 보냈다.
각번의 실력자라고 하면 결국 료마를 리더로 모시고, 대정봉환을 주도했던 사이고, 오쿠보, 기도, 고토 등이겠다.
그리고 얼마 안가 오미야.
나가오카 신타로와 사카모토 료마가 머물던 방에 괴한이 침입했고 삿쵸 동맹의 주역은 그렇게 명을 달리했다.
향년 31세.
료마를 리더로 모셨던 존황양이파는 오랜기간 료마를 추적했던 신센구미를 범인으로 몰았고,
신센구미 조직원들은 그렇게 보신전쟁 이후 사형 당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진상은 하코다테 전쟁 이후 교토 미마와리구미에 진술로,
신센구미가 이닌 교토 미마와리구미에 의해 료마가 죽었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오미야에 침입해 료마를 벤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밝혀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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