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일본은 투쟁과 시위의 시대였다.
그 모든 시작은 新미일안보조약의 체결 및 미일 안보체제의 연장이었다.
1960년(쇼와35) 新미일안보조약의 체결을 앞두고
미일 안보체제에 반대하던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 그리고 주요 노조 및 운동권이 주도하여
안보투쟁이 나가타초를 뒤덮었다.
결국 신조약은 체결되어 미일 안보체제는 무기한 연장되었고, 그 대신 기시 노부스케 내각총리대신이 사임했다.
그렇다고 이런 식의 투쟁과 데모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도쿄대학, 와세다대학, 메이지대학, 주오대학, 오사카대, 교토대 등등 주요 대학에서 학비 투쟁 등이 발생했고,
이러한 시위는 좌익단체였던 전학련이 주도한 것이었다.
1964년의 도쿄 올림픽으로 국제공항의 설비 확대를 체감한 일본정부는
지바현 나리타시 산리즈카 일대에 신 도쿄 국제공항(나리타 국제공항)의 건설을 계획했다.
이 지역은 구 식민지에 거주하다 쫓겨난 히키아게샤의 거주지였고, 토지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6년(쇼와41) 산리즈카시바야마연합(이하 산리즈카연합)이 결성되었고, 이후 산리즈카 연합은 나리타 투쟁을 주도했다.
안보 투쟁, 학비 투쟁, 나리타 투쟁, 그 외의 주요 노조의 데모
현 시점에서 본다면 전반적으로 실패했다 평가할 투쟁이었고, 과격한 무력 시위라는 점에서 좋게 보기 힘들기에
솔직히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평가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 시위들은 나름의 논리성을 가졌고, 실패 원인에 있어서도 공권력에 의한 소위 '억까'가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투쟁은 부분적으로라도 이어질 여지가 충분하지 않겠는가?
나리타 투쟁의 경우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현재도 잔존해있다. 그리고 이를 지지해주는 세력도 남아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대규모의 투쟁 및 지지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대학 투쟁은 전멸했다. 법적으로 이를 막을 수단이 생긴 것도 있지만 대학 내에서 시위를 주도할 주체가 없다.
소위 일본을 언급할 때 '시위를 하지 않는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본은 시위가 상당히 적다. 메이와쿠 문화에 의거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젊은 층의 시위 참여가 없다시피하다.
애초에 시위라는 방식의 저항 및 투쟁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없지 않다.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역시 '적군파'라고 할 수 있겠다.
1970년(쇼와45) 전국파는 일본항공 351기를 납치해 북한으로 이동하는 계획을 행동에 옮겼다.
이 항공기는 하네다에서 후쿠오카로 이동하는 항공기였고, 당연히 승객도 있었지만,
그들의 안전은 무시한채, 연료의 상태는 신경쓰지 않은채 하이재킹해 북한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승객은 김포에서 구출되었고, 적군파 납치범이 북한에 도착한 후 항공기와 기장 등은 귀국하게 되었다.
1972년(쇼와47) 아사마 산장 사건이 발생했다.
적군파는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중부 산악 지대에 베이스를 설치해 무장 반군으로의 성장을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나가노현의 아사마 산장을 점거했다.
산장 주인 등은 인질로 붙잡혔고, 결국 경찰과 자위대에 의해 인질극은 제압되었다.
그리고 체포된 적군파인사들로부터 산악 베이스의 실체와 그 내부에서 있던 폭력적 실채가 표면에 드러났다.
이 이후 적군파는 일본에서의 입지를 완전히 잃었다.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한 적군파는 1971년(쇼와46) 일본적군을 설립했고,
일본 밖에서 일본 대사관 등지를 대상으로 한 테러를 자행했다.
적군파가 이와 같은 무장 테러를 자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적군파는 공산주의 강경 무장 투쟁 단체였고, 공산주의적 이상 실현을 집착하듯 강조했다.
그들의 강경한 행태는 그들의 이상 실현에 장애물이 되는 인물뿐 아닌,
민간인과 내부 인사에게도 피해를 가했고, 이에 대한 적군파 내외의 반발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 결과 공산주의적 이상에 대한 설득은 조금도 이어지지 않았고, 일본정부는 그들을 합법적으로 탄압하고 수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행태는 이상 실현을 위한 혁명이 아닌,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테러리즘과 반달리즘에 불과했으며,
이러한 선택은 적군파 스스로가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구 사항이 있기에 시위를 하는 것에 대해 나는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평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위가 합법적인 범주 내에서 이루어진다면 나는 그 시위를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
현대의 시위라는 것은 굉장히 합법적인 범주 내에서 이루어진다.
환경단체들이 페인트를 들이부으며 시위할 수 있는 것은 그 페인트가 자연분해되며, 환경에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의 정치적 시위 혹은 파업은 법적 범주 내에서 그 규모와 활동이 지켜진 채로 진행된다.
내가 그 시위의 이유나 목적은 비판해도 그 시위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합법성 및 비파괴성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불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시위가 아니게 된다.
그 목적이나 원인이 무엇이건 반달리즘에 불과하며, 테러리즘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이는 결국 시위의 목적이나 원인을 시위 비가담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역효과인 것이다.
적군파가 공산주의 이상의 실현이라는 목표에 대해 테러리즘으로 반감만 키웠듯
불법적이고 파괴적인 시위는 그 원인과 목적을 퇴색시키며, 역효과만 발생시킬 것이다.
이것이 적군파가 주는 교훈이다.
아마 이런 건 나이가 스물이 넘으면, 성인이 되면 알아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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