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보수 정치인, 특히 자유민주당에 대해서 언급할 때 자주 언급되는 두 단어가 있다.
보수본류/보수방류
한자에서 보듯, 보수본류이 메인이고(本), 보수방류는 곁다리(傍)라는 느낌이 없지는 않다.
현재는 이 구분이 큰 의미가 없지만, 옛날에는 이 구분이 상당히 중요했다.
그리고 이 구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자민당의 파벌 정치로 이어지기에 한 번은 서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보수본류(保守本流)
시작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좀 갈린다.
포괄적으로는 요시다 시게루로 보는 의견도 있고, 사토 에이사쿠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나는 다나카 가쿠에이로 본다.
어느쪽도 크게 틀린 건 없다고 본다.
사토 에이사쿠를 행정부의 주요 인사로 만든 게 요시다 시게루이고,
다나카 가쿠에이를 정치적 후계자로 만든 건 사토 에이사쿠이기 때문이다.
5대 파벌이야기로 넘어가면 길어지니 생략하자면, 보수본류는 크게 두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이케다 하야토가 창설한 굉지회, 다나카 가쿠에이가 주축이 된 목요클럽(현 헤이세이 연구회)
굉지회는 이케다 하야토-마에오 시게사부로-오히라 마사요시-스즈키 젠코-미야자와 기이치가 주축이 되었으며,
목요클럽과 협력하여 보수본류의 1.5인자같은 역할을 하였다.
미야자와 기이치를 끝으로 55년 체제가 끝났고, 가토의 난이 폭망하며 중소파벌로 전락했다.
우정해산 이후 부활하나 했지만 아소 다로와 다니가키 사다카즈의 이탈로 다시 한번 입지가 흔들렸다.
2021년 굉지회 회장 기시다 후미오가 총리가 되면서 자민당을 대표하는 파벌로 다시 떠올랐고,
아소 다로의 지공회, 다니가키 사다카즈의 유린회를 흡수해 자민당 제1의 파벌로 만드는 '대굉지회 계획'도 구상했으나
뒷돈 논란으로 해산하며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목요클럽은 이름을 여러차례 바꾼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파벌을 이끌며 각복전쟁에서의 승리를 반복할 때에는 목요회,
다케시타 노보루가 목요회를 이탈해 창정회를 설림한 후 다나카 가쿠에이를 몰락시키며 파벌을 전부 흡수했을 때에는 경세회,
55년 체제 종식 직후 오부치 게이조가 보수본류를 개편한 후부터 지금까지는 헤이세이 연구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보수본류 제1의 파벌이었고, 목요회의 부회장은 곧 다나카 가쿠에이의 최측근으로 차기 총리 1순위 인사였다.
그만큼 이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았고, 그렇기에 분열될 수 밖에 없었던 파벌이기도 했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니카이도 스스무, 다케시타 노보루 등의 측근을 두면서
동시에 오자와 이치로, 오부치 게이조, 이시바 시게루 등의 젊은 정치인들을 성장시켰고,
그 젊은 정치인들이 이제 한자리씩 할 시간이 다가오니 그들끼리 파벌을 가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다케시타 노보루가 경세회로 목요회를 흡수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다케시타가 오부치의 손을 들어주며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는 파벌 내 영향력을 잃었고,
겸사겸사 내각에서도 쫓겨나니 결국 자민당을 탈당해버렸다.
자민당 탈당러쉬로 가장 피해를 본 파벌이었고,
55년 체제 이후 오부치 게이조가 개편했으나 오부치가 급사하고 하시모토가 이후 고이즈미와의 당권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그냥저냥인 파벌 1정도로 전락해버렸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보수본류의 정치인들은 비교적 온건, 혹은 좌익이라는 이야기도 들을 정도로 온건했다.
전술핵 배치 문제로 잊을만하면 폐기하자 소리를 듣는 비핵화 3원칙도 다나카의 정치 스승인 사토 에이사쿠가 만들었고,
한국과의 외교 문제에 있어 대화를 진행시킨 것도 다나카 가쿠에이와 오히라 마사요시였다.
이후 김대중과의 회담으로 문화교류를 적극화 시킨 것은 오부치였다.
위안부 피해를 인정하고 이를 국가 공식 입장으로 만든 고노 요헤이도 보수본류였다.
단, 정치와 행정에 있어서는 그들의 독단이 두드러졌다.
실무자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론만을 강조했으며, 이는 실무자들과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자민당 지지율이 떨어지는 현상을 야기했다.
게다가 해당 분야에 깊숙히 발을 들이며 관련 비리나 폐단도 심각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노조를 탄압하고 뒷돈을 받았으나 법무장관의 방해로 검찰조사를 피한 이력이 있으며
다나카 가쿠에이는 금맥문제와 록히트 사건으로 유명하다.
다케시타 노보루를 무너트린 리쿠르트 사건, 55년 체제를 끝낸 사가와 규빈 사건 모두 보수본류가 받은 뒷돈이 기인했다.
결국 파벌싸움으로 분열되고 온갖 비리로 망가져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후 보수방류에게 당론을 빼앗겨 지금도 보면 전반적으로는 보수방류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현재를 대표하는 보수본류인사에는
아소 다로, 기시다 후미오, 고노 다로, 모테기 도시미츠, 이시바 시게루가 있지만
파벌에 의한 분류일뿐, 그리 본류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성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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