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본류는 여기로
보수방류
보수본류가 그랬듯 시작점에는 이견이 갈린다.
하토야마 이치로인가 혹은 기시 노부스케인가
결론적으로 GHQ의 공직추방령으로 인해 요시다 시게루가 일본자유당을 차지했고,
그 일본자유당의 멤버가 보수본류의 근원이라면,
공직추방령으로 인해 정계에서 멀어져 있던 정치인들과 그 정치인들이 구성했던 일본민주당의 인사가
보수방류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하는 보수방류의 시작점은
하토야마 이치로의 후계자인 기시 노부스케의 휘하 있던 정치인들 중 그 리더라 할 수 있는 후쿠다 다케오,
그리고 이시바시 단잔의 정치적 후계자인 미키 다케오, 이 둘로 꼽는다.
전반적인 성향은 자민당의 야당이었다보니 비교적 강경하고 거친 면이 있다.
게다가 하토야마 이치로와 기시 노부스케가 전전 쇼와에서 정치를 했던 점 때문인지 극우 성향도 없지 않다.
뒷돈 받을 때에도, 보수본류는 기업으로부터 받을 때, 보수방류는 통일교한테 받았다.
이렇듯 연호가 쇼와이던 시절엔 야당같은 여당의 느낌이 강했다.
실제로 다나카 가쿠에이와의 당내 권력 대결에서 후쿠다 다케오는 매번 졌고,
미키 다케오는 그 후쿠다와도 손을 못 잡아서 총리직을 내려놓기도 했다.
보수본류의 핵심파벌은 후쿠다 다케오가 1962년(쇼와37) 창설한 '당풍쇄신간담회'로
기시 노부스케의 파벌인 십일회가 기시에 의해 해산된 후 후쿠다 다케오가 그 대부분을 흡수해 만든 파벌이다.
1998년(헤이세이10) 회장이었던 모리 요시로에 의해 '세이와 정책연구회(이하 청화회)'로 개편했으며,
2024년까지 이어지다가 뒷돈 문제의 짬을 제대로 맞으면서 해산했다.
요즘 보면 뒷돈 논란에 문제로 청화회가 해산된 게 아니라, 청화회를 해산시키려고 뒷돈 논란이 터진 거 같단 말이지.
미키 다케오는 1956년(쇼와31) 번촌정책연구소를 설립했는데,
미키는 물론이요, 미키의 정치적 스승인 이시바시까지 좌익성향이 두드러지는 '보수 좌파'였기에
자민당 내에서는 아웃사이더 느낌이 강했다.
미키의 정계 은퇴 이후에는 고모토 도시오와 고무라 마사히코가 회장을 역임했고,2017년 지공회에 흡수되었다.
극우 성향인 청화회와 온건하고 중도적 성향의 번촌정책연구소는 공조가 쉽지 않았고
다나카 가쿠에이 조지기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목요회와 오히라 마사요시의 굉지회,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춘추회가 쉽게 협업한 것과 상당히 비교된다.
청화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여기는 굉장히 끈끈한 집단이었다.
특히 이 면모를 돋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회장이었던 아베 신타로(아베 신조와 기시 노부오의 부친)였다.
아베 신타로의 지원을 받아 정계에 두각을 드러낸 인물들은 청화회의 주축을 담당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리 요시로와 고이즈미 준이치로였다.
그 인물들이 2000년 모리 요시로의 총리 취임 이후 일본 정계의 얼굴로 떠올랐고,
여기에 더해 우정해산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보수본류를 몰락시키고 청화회가 당을 장악해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이 업적을 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모리와 고이즈미가 아베 신타로의 정치적 제자였으니
그 은혜가 아베 신조에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베 신조의 정치적 성장에 그의 부친을 빼먹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후 보수방류는 최대 파벌로 자리해버렸고
보수본류의 아소 다로, 기시다 후미오도 보수방류와의 협업 없이는 내각 구성이 불가능했다.
당론은 보수방류가 주도했으며, 그 당론을 거부한 보수본류 정치인들은 우정해산 때 탈당 후 신당을 창단해 무난하게 몰락했다.
그러니 당에 남은 보수본류마저 보수방류의 당론에 동조하게 되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보수방류와 보수본류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시다가 총리에 내정될 당시 들었던 소리가 아베의 후계자 아니었던가? 아베는 방류고 기시다는 본류다.
그 덕에 나는 아직도 기시다가 본류인가 방류인가 헷갈린다. 뭐 의미있는 구분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선술한 뒷돈 논란 이후 청화회는 해산했다. 미키 다케오가 만든 번촌정책연구소는 본류인 지공회에 흡수당해 버렸다.
보수방류의 전성기를 연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아베 신조와의 갈등으로 보수방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그 결과 고이즈미 신지로는 청화회에 가입한 적이 있을 뿐 독자노선의 길을 걷고 있다.
청화회 출신 인사들이 밀어준 다카이치 사나에마저 결선투표에서 패배해 당 총재에 취임하지 못하면서
최대 파벌 청화회의 명색은 기시다파에 밀린 군소파벌 정도로 퇴색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생사의 기로에 놓여버린 2000년대 자민 최대 파벌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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