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중국이야기를 해보자.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기독교 포교가 허용되었고, 해안의 조계지에는 서양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아편의 폐해는 물론이고, 기독교 및 서양세력에 대한 반감으로 반서방 감정이 고조되었고
이는 청일전쟁의 패배와 양무운동의 실패로 중국다움에 대한 고찰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의화단이다.
의화단은 의화권이라는 무술을 연마하던 집단이며, 백련교의 일파라는 설도 있다.
중국다움에 대한 고찰이 전통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변질되어 무술로 총칼을 막을 수 있다는 식으로 왜곡되었고
의화단은 이에 호응하듯 중국 전역을 돌며 차력쇼로 스스로를 홍보하며 단원을 모아갔다.
그런데 애초에 총칼을 어찌 막는가?
백번 양보해 냉병기는 강력한 육체로 막는다고 치겠다. 하지만 강선이 도입된 시대에 총탄을 어떻게 버티는가?
그리고 의화단의 억지스러운 논리와 반서방감정이 결합해 결국 사단이 일어난 것이었다.
1897년(메이지30) 산동에서 독일인 선교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은 이를 키아우초우 공격 빌미로 사용했고, 청 역시 이 사건에 대한 후속조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1899년(메이지32) 선교사 살해 사건은 점차 청 영토 내에 대한 외국인 습격으로 확대되었고,
이에 청 황실의 아오신기오로 자이이까지 의화단의 무력행동을 부추기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의화단 운동, 일본에서는 북청사변으로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대규모의 외국인 습격 사건에도 불구하고 청은 이를 서양의 새로운 공격 빌미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서양 세력을 몰아낼 기회로 여겼다.
순식간에 수많은 외국인이 강간당하고 학살당했다. 그리고 청 황실은 이 사태를 좌시했으며
서태후 등은 배후에서 은근한 지원을 보내기도 했다.
규모가 커지니 중국에 체류 중인 서양 군대만으로는 이를 진정시키기 어려웠고,
의화단이 주창한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는 실현되는 듯 보였다.
의화단의 만행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각국은 연합군을 결성해 의화단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위 사진에서 좌측부터 영국, 미국, 영국령 호주, 영국령 인도제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 일본군으로,
그 외에 위 사진에는 없지만 러시아가 참전했으며,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도 물자를 지원해 의화단 운동 연합군에 참여했다.
소위 8개국 연합군(영, 미, 독, 불, 오헝, 이, 일, 러)은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결과는 뻔하다. 총은 육신을 뚫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더라도 거의 모든 중국인이 참여한 이 사태에서 연합군은 쪽수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쪽수를 메우려면, 본국에서 군사를 끌어와야 하는데, 당장의 사태에 언제 수에즈 운하를 넘어 군대를 옮기냐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 열강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의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본토를 향해 본국 주력군을 이동시킬 수 있는 연합군 내 유일한 국가
일본에게 말이다.
이러한 외교적 상황을 일본이 이용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특히 아관파천이 끝나 조선 식민지화의 희망이 부활했기에,
향후 대륙침략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중국 문제에 대해 러시아보다 우위를 점해야 했는데
의화단 운동은 일본에게 중국 문제에 있어 우위를 점할 기회라 판단된 것이었다.
1899년 결성된 8개국 연합군의 구성을 보면, 50000에 달하는 병력 중 21000명이 바로 일본군이었다.
프랑스와 미국은 군사 몇백을 겨우 보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육군은 파견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일본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부대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겠다.
중국과 국경을 접하는 러시아와 영국(인도와 버마)의 경우에도,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있다해도 이동에 시간이 걸려 쉽지 않았으며, 영국은 히말라야 넘어야 하는 난관이 있었다.
그래도 영국과 러시아는 각각 12000과 13000의 병력을 보냈다.
어쩌면 이 부분은 중국 문제에 있어 가장 적극적인 두 유럽국가가 영국과 러시아였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청 조정은 실책을 반복했다.
의화단을 반란 도적떼 정도로 여겼던 이홍장, 위안스카이와는 달리 서태후와 청 황실은 공식적으로 의화단을 지지했고,
결국 두 달만에 베이징이 함락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보복을 시작했고, 그렇게 베이징은 피바다가 되었다.
8개국 연합군은 의화단을 대상으로 현상금을 걸었고
그렇게 의화단과 민간인 등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나서야 의화단 운동은 종식된다.
의화단 운동으로 청 황실은 공식적으로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의화단 운동 종결을 위한 청국 대표로 노쇠한 이홍장이 다시 한 번 기용되었고,
청은 8개국에 4억 5천만냥의 배상금 및 공사관 경비병 주둔 허가,
북경으로 접근하는 철도 인근과 같이 주요 요충지에 외국군 주둔을 허락하는 등
아예 국권을 잃는 수준의 요구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1901년(메이지34) 신축조약(베이징 의정서)이 체결되었다.
(여담으로 1940년을 만기로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했으나 이는 끝내 전부 지급되지 못했다)
4억 5천만냥 중 일본이 가져간 것은 7.7%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양 각국은 중국 문제 및 동아시아 정세 안정을 위해 일본에 대한 필요성을 체감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러시와 독일의 확장주의가 구체화되어감에 따라 유럽의 정세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이는 각국이 배후에서 동맹을 맺고 군사협력관계를 구축하는 양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일본에게 일임함과 동시에 그 해결 및 결과가 자국에게 이익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에 협조해야했고,
그렇게 일본은 '극동의 헌병'으로 제국주의 국가로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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