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목을 하나 달자면
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
물론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군사학이나 전술 무기 등에 대한 부분은 생략할 것이다.
1904년 2월 8일 인천
일본 군함의 호위를 받은 수송선 몇대가 내항했고, 그 수송선에 수송된 것은 물자가 아닌 군인들이었다.
일본군은 순식간에 인천항의 러시아군을 포위했고, 인천항을 나가지 않으면 즉시 포격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인천항 밖에는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명령을 받은 함대가 대기 중에 있었다.
결국 위 사진처럼 코리에츠 함은 폭파되어 침몰했고, 수많은 러시아군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일본군은 그대로 인천을 장악, 한성으로 향해 대한제국 조정을 장악해버렸다.
대한제국은 부랴부랴 중립국 선언을 했으나 의미는 없었다.
그렇게 또 한번 선전포고 없이 일본은 전쟁을 개시했다.
제물포의 승전보가 들려오자마자 서해에서 대기 중이던 연합함대 본대는 그대로 북상해
러시아가 조차 중이었던 뤼순(다롄)을 공격했다.
비록 일본군의 피해도 극심했지만 며칠만에 뤼순에 대기 중인 러시아 함대는 괴멸했으며,
3개월 후인 1904년 5월 러시아는 결국 일본군이 뤼순에 상륙했다.
전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러시아 역시 주력군을 동원시켰다.
육군은 연해주와 북만주에 대기 중이었으며, 비교적 충원하는 게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해군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돈을 많이 때려부어 최강의 함대로 불리던 러시아의 발트 함대였으나
이름처럼 발트해 연안에 있어 오려면 유럽을 돌아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지나야한다.
그러고 나서도 인도양을 횡단해 말라카 해협을 거쳐야 하니 그 거리는 지금의 기술로도 상당한 거리이다.
그렇기에 러시아의 목표는 발트 함대가 동아시아에 도착하는 것에 맞추어 만주전선의 승기를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실현되면 조선을 넘어 일본까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에서 러시아 함대에 대해 운하 사용 불가를 알렸다.
이는 당시 군함의 흘수선이 수에즈 운하의 깊이보다 깊어 통행은 물론 운하를 막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고,
결국 발트 함대는 희망봉을 건너 일본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
발트 함대의 출발 소식은 전세계에 알려졌으니, 이에 맞추어 일본은 이를 격퇴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다만 이를 실패한다면 일본은 해상에서 봉쇄된다.
물론 해군이 발트해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 중이던 해군은 동해안에서 일본 해군을 괴롭혔고,
바다 건너 총탄 보급을 진행하던 수송선 한척이 침몰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의 총사령관은 오먀아 이와오였다.
1904년 3월 일본 육군은 뤼순 공략군을 4군으로 나누었는데, 이 중 3군은 뤼순의 점령 및 방어를 맡게 했고,
나머지 1군, 2군, 4군은 진저우, 랴오양 방면을 공략했다.
같은 해 5월 러시아 해군은 뤼순에서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8월 일본 육군은 뤼순 상륙을 시도했다. 그리고 여기에 기용된 3군의 사령관이 바로 위에 저 인물
노기 마레스케였다.
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
도고는 후술할 쓰시마 해전의 업적으로 인해 나름 고평가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역 이후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소신을 강조했던 점,
세계적으로 이순신에 대해 주목한 계기가 바로 도고였다는 점으로 인해
노기는 도고에 비하면 덜 주목 받는 감이 있다.
그런 노기에게 있어 강조할만한 업적이라 한다면 역시 뤼순 공방전일 것이다.
1904년 8월 노기는 1차 뤼순 상륙 작전 시행했다.
당시 뤼순은 러시아군에 의해 해안에 콘크리트로 지어진 포대가 설치되어있었고
그 포대를 함대포격으로 파괴한다해도 주요 고지에는 러시아군의 방어진영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그런데 뤼순은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선 방면의 철도 및 서해 제해권을 이용해 만주 방면의 보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고,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일본을 차단할 전략적 요충지임과 동시에 부동항이었다.
따라서 여기에 쏟아부은 병력이 5개월 간 양측 도합 20만이 넘었다.
8월 1차 뤼순 공방전에서 일본은 5만의 병력을 투입했으나 5000명이 죽고 10800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 끝에
퇴각했다.
이 실패는 전쟁을 강조하던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희생자 유족들의 비난까지 받아야했다.
정부는 노기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1차 뤼순 공방전이 한달도 지나지 않아 2차 뤼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뤼순의 해서산과 이령산을 공략했고, 해서산의 러시아군이 퇴각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령산이 비교적 준비가 미비했던 방어 진영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막아내 결국 2차 공방전도 일본의 패배로 끝난다.
이 이령산의 높이는 203m, 즉 여기가 그 유명한 203고지이다.
10월 중순 노기는 메이지 덴노의 생일을 맞아 뤼순을 덴노의 생일선물로 바치지 못하면 ㅈ될 수 있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결국 3차 뤼순 공방전이 시행되었고, 러시아가 일본군의 진출로를 차단하여 진군자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노기는 포격에 집중했기에 비교적 사상자는 발생시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뤼순 함락에는 실패했다.
이 즈음에 발트 함대가 동아시아로 이동 중이라는 첩보가 전해졌다.
그리고 11월 4차 뤼순 공방전 노기는 203고지(이령산)를 공격했고,
일주일 간 이령산 정상의 깃발이 수차례 바뀌는 혈전 끝에 일본이 203고지 함락에 성공했다.
203m라는 낮은 높이에도 불구하고 그 근처 거점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했기에,
203고지로부터 쏟아지는 포격에 러시아군은 버틸 수 없었고, 결국 뤼순은 일본의 손에 떨어졌다.
뤼순이 함락되자 일본은 펑톈, 라오양 등으로 진군했다.
1905년 3월 일본은 펑톈을 점령했으나, 그간 너무 많은 병력이 갈려버렸고, 더이상의 진군을 포기하게 되었다.
애초에 뤼순에서 사상자가 6만이었다. 예비군과 보충역을 전부 동원했고, 이제 더 조달할 군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뤼순을 잃은 러시아의 마지막 희망은 발트 함대였다.
1905년 초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박살나 러시아의 국내정세는 상당히 불안했고
굶주린 민중 앞에 니콜라이 2세가 발포를 명령하며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해버렸다.
이러한 참사에도 불구하고 발트 함대가 승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다.
1905년 5월 발트 함대가 동아시아에 드디어 도달했다.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는 발트 함대가 접근하면 여러 차례의 소규모 공격으로 힘을 빼놓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첫번째 전장이 바로 러일전쟁을 앞두고 요새화되었던 쓰시마였다.
표토르 1세가 만들어 이후 백 몇년 간 유럽 최대 규모의 투자로 그 위력을 자랑했던 발트 함대였지만
오랜 항해로 지쳐 방심한 탓이었을까?
기습적인 일본 해군의 공격에 무방비로 당했고, 쓰시마 앞바다에서 무기력하게 침몰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더이상 일본과 전쟁할 원동력을 잃었고, 그렇게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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