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메이지33) 의화단 운동의 진압 및 군사동원을 이유로 러시아가 만주를 향해 진군했고
이는 향후 조선 식민지화 및 중국 침략을 노리는 일본에게 있어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이 되었다.
러시아에 대한 관계 설정은 당시 내각인 2차 야마가타 내각의 핵심 외교 의제로 떠올랐고,
이는 러시아와 협상할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제3의 세력과 손잡을 것인가를 두고
일본 정계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 결론이 나오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01년 청러밀약이 체결되었고, 청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인정하기로 결정해버렸다.
당시 청에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대러협조론이 주류 의견으로 자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영국과 일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얼마 안가 노쇠한 이홍장이 병으로 사망해 없던 일이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일본은 영국이 대러문제에 있어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고 느꼈고,
이는 영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토 다카아키 등이 추진했던 영일 간의 동맹 협상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러시아와의 협상을 추진했던 것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8개국 연합군을 언급하면서 그 결성 배경과 함께 설명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유럽은 두개의 동맹이 대립하는 형국으로 나뉘어진 상태였다.
비스마르크가 퇴임한 후 독일은 확장주의 노선의 신노선 정책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독러군사동맹조약의 만기를 앞두고 연장에 대한 협상에 불참하며 이를 폐기시켰다.
그렇게 비스마르크가 만든 삼제동맹(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독일은 이 자리를 대체할 새로운 동맹국으로 이탈리아를 끌어들였다.
여기에 더해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러시아 견제라는 이해관계를 공감하여
독일-오헝-이탈리아-오스만으로 이어지는 군사동맹이 유럽 정세의 한 축을 담당했다.
러시아와 독일 간 군사동맹이 폐기된 원인 중 하나는 프랑스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차관 등, 프랑스는 비스마르크 외교로 고립된 형국을 타파하려 러시아에 접근했고
이는 러불동맹으로 이어졌다.
고립주의 외교를 고집하던 영국의 입장에서 프랑스와 러시아, 영국의 라이벌 둘이 손을 잡으니
이제는 더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에 집착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미국은 필리핀 확보를 이유로 아시아에 다시 진출하게 되었고, 동아시아 정세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져서 형성된 것이 8개국 연합군이었다.
일본은 그렇다치고, 지금 언급한 모든 나라가 참전했으며, 오스만도 나중에 참전을 했다고 알고 있다.
그레이트 게임이 지속 중이었던 1902년(메이지35), 러시아 견제라는 영일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였고,
마침 영국과 일본은 조약개정교섭으로 자주 접촉했던 경험이 있어 서로에게 나름 익숙했다.
그해 12월 주영 일본공사 하야시 다다스는 영국 외무장관 랜스다운과 영일동맹을 위한 협상교섭을 시작했고
1903년 3월 제1차 영일동맹조약이 체결되었다.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였다.
영일 양국은 영국이 청에 대해, 일본이 조선에 대해 가지는 특수한 이익을 인정하며,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제3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다른 동맹국은 중립국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도 일본과 접촉하여 일본과 준군사동맹 격의 관계를 맺었고,
영일동맹도 1910년(메이지43) 영일동맹조약의 제3국에 해당하는 국가에서 미국은 제외하기로 결정했다.(제3차 영일동맹)
그렇게 일본은 영국-미국이라는 구미세계의 강대국과 협력관계를 맺으며
거인 러시아와의 결전을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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