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사를 좀 안다하면 익숙한 가문인 호소카와 가문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무로마치 막부의 간레이 세 가문 중 하나인 호소카와 본가이다.
이후 본가는 절멸, 방계가 전국시대 끝에 살아남았고 에도 시대 구마모토 번에 전봉되어 히고 호사카와 가문으로 자리 잡는다.
판적봉환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다이묘 가문이다 보니 히고 호소카와 가문은 후작 작위를 받아
근대 일본에서 귀족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 증거 중 하나가,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외조부가 누구냐?
고셋케에 최고봉인 고노에 가문의 당주이자 대정익찬회를 만든 문관 최악의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이다.
이런 집이랑 사돈을 맺을 정도니 더 설명은 필요없겠다.
여담으로 고노에 가문은 대가 끊겨 양자를 들였는데, 그게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동생이다.
다시 호소카와 모리히로 이야기로 돌아가자.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조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했고, 아사히 신문사 가고시마국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상은 화족에, 외조부는 심지어 고노에 후미마로였지만,
진보 성향 대학인 조치대학을 졸업해 좌익 성향 언론사인 아사히 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한 탓일까?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성향은 전반적으로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자로 활동하면서도 환경운동을 한다던가, 김희로 사건을 취재하면서 재일 한국인에 관심을 가진다던가
다이묘 귀족 집안 도련님이 할만한 행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아사히 신문을 퇴사하고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려한 호소카와는 처음에는 일본사회당에 접근했다.
당시 구마모토현 1구의 중의원 의원은 일본사회당의 마쓰마에 시게요시였기에
구마모토에 본적을 둔 다이묘 가문 도련님에게 있어 일본사회당 입당은 순조로웠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갑자기 호소카와는 스스로 '나는 보수다'를 선언하고 일본사회당 가입을 보류시켰으며,
무소속으로 중의원 총선에 출마하게 된다.
그 결과 마쓰마에와 표를 나눠먹어 자민당이 구마모토 1구를 가져가는 참사를 만들어낸다.
결국 1971년(쇼와46)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자민당에 입당한다.
그 해 다나카 가쿠에이와 만나 참의원 통상선거 출마를 제의받았고, 전국구 후보로 출마해 참의원에 당선된다.
이 이후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보수본류로 분류되었다.
6년의 참의원 임기를 마친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구마모토현지사 선거에 출마할 것을 시사했고,
구마모토의 다이묘 가문에서 구마모토현지사를 배출하는 쾌거를 이룩해낸다.
두번의 임기 동안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호소카와의 3선 도전은 확실해 보였으 '권불십년'이라며 출마를 포기했다.
1992년(헤이세이3)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일본이 리베이트로 썩어간다며, 그 부패의 원인이 양당 구도에 있다고 주장했고,
이 양당제를 혁파해야 한다며 신당을 준비중이라고 말했다.
전설의 정당이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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