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헤이세이3)과 1992(헤이세이4) 자민당은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달까?
일단 그 유명한 버블경제 붕괴의 시작으로 실업률과 기업 부도가 본격화되는데
자민당은 지들끼리 싸우고 난리였다.
1991년 말 결국 가이후 도시키 총리가 차기 총재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미야자와 기이치가 하타파의 지지를 받아 총리에 오른다.
당 내에서는 하타파와 오부치파가 치고 박고 싸우고 있었고, 소련 붕괴에 유엔 평화유지군에 자위대 파견 논쟁으로 어지럽기만 했다.
1992년 사가와 규빈의 전 회장 와타나베 히로야스가 다케시타파와 이나가와회 야쿠자에게 돈을 대줬다는 정황이 포착되었고,
그 결과 사가와 규빈을 시작으로 다케시타파와 야쿠자 간의 유착관계가 드러난다.
이 유착관계의 핵심으로 지목된 것은 당시 경세회(다케시타파)의 수장이었던 가네마루 신이었고,
결국 이 혐의로 인해 가네마루 신이 의원직에서 사퇴하고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경세회 회장은 누구로 할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이미 경세회는 하타파와 오부치파로 반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다나카파-다케시타파의 적자라 할 수 있는 오자와 이치로는 하타 쓰토무를 경세회 차기 회장으로 추천했고,
가지야마 세이로쿠, 하시모토 류타로 등은 오부치 게이조를 추천했다.
결과적으로 다케시타 노보루의 지원 하에 오부치 게이조가 차기 회장에 취임했고,
하타파는 그대로 경세회를 탈퇴해 개혁포럼21이라는 파벌을 신설한다.
그리고 이맘때 즈음 일본신당이 창당했다.
16회 참의원 통상선거를 앞둔 정국에 창당했으니, 일본신당의 첫 목표는 단연 참의원 의원 배출이겠다.
16회 참의원 통상선거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전체 의석 수는 252석이다.
자유민주당: 107석-과반 확보 실패
일본사회당: 71석
공명당: 24석
일본공산당: 11석
민사당: 7석
일본신당: 4석
스포츠평화당: 2석
제2원 그룹: 2석
연합회: 12석
제파: 4석
무소속: 8석
일본신당은 원내 입성에 성공했고, 자유민주당에게는 정권 유지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 때 일본신당이 배출한 4석의 참의원 의원을 보자.
비례 2번: 고이케 유리코
비례 3번: 데라사와 요시오
비례 4번: 다케다 구니타로
굉장히 익숙할 수 있는 이름이 하나 보일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고이케는 일본신당에서 굉장히 핵심적인 역할을 도맡았던 인물이다.
일본신당은 이 정도 성과에서 멈추지 않았다.차기 선거를 위해 젊고 새로운 인물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는데, 이때 영입한 인물 라인업이 미쳤다.
이 중 모테기와 이토는 자민당에서, 에다노는 민주당과 입헌민주당에서,
마에하라는 민주당과 국민민주당을 거쳐 현재는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의 당대표로 있다.
무엇보다 이때 들어온 일본신당 멤버 중 가장 높이 올라간 사람은 이 사람일 것이다.
내가 일본신당을 전설의 정당으로 부르는 첫번째 이유
아웃풋이 미쳤기 때문이다.
비록 일본신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일본신당의 멤버들은 지금도 일본에서 정치를 하고 있고,
특정 정당에 한정된 것이 아닌, 좌우 별별 정당에 다 손이 뻗어 있다.
심지어 총리까지 나왔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일본 정치 > 헤이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설의 정당 일본신당-4 (0) | 2024.09.10 |
---|---|
전설의 정당 일본신당-2 (0) | 2024.09.10 |
전설의 정당 일본신당-1 (0) | 2024.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