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9년(덴분8) 중국 근해에서 마카오로 향하던 포르투갈 상선이 태풍을 만나 표류했고
그 중 일부가 살아남아 규슈 최남단의 다네가시마에 상륙했다.
유럽세계에 황금의 나라 지팡구의 실존이 전해지는 순간이자
일본에 유럽의 기술이 전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가장 탐이 나는 물건은 뎃포(鉄砲), 즉 조총이었다.
전국시대가 한창이던 혼란 속의 일본에 있어 조총은 곧 비대칭 전력을 양성하는 신무기였고,
우리에게 있어 그 전투력의 실상은 임진왜란 초기의 전황으로 증명이 가능한 것이겠다.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인원들을 시작으로 서양 상인들은 일본으로 향했고,
무역 거점과 경제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다이묘들에게 조총을 제공하고 판매했다.
이는 상인들을 따라 일본에 당도한 예수회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는 서국의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조총을 바쳤고,
오우치 요시타카는 그 댓가로 폐사 다이도우지를 제공했는데 이것이 일본 최초의 교회이다.
나가사키 일대를 중심으로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일본과 무역활동을 했고,
일본의 상인들도 역시 동남아로 가 일본의 물품을 판매하는 등, 동남아 무역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동남아 무역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일본에 등장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흑인노예였다.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서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 일대에 무역거점으로 식민도시를 건설했고,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 등을 통해, 무역을 기반으로 한 해적과도 같은 무역활동은 그 일대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16세기 유럽에 흑인 노예가 존재했음은 쉽게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흑인 노예들은 필요에 의해 상선을 타고 동남아시아를 넘어 일본까지 당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당대의 그림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弥助 - Wikipedia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弥助(やすけ、生没年不詳)は、安土桃山時代の日本に渡来した黒人男性。宣教師から織田信長へと進呈され、信長が死去するまでの約1
ja.wikipedia.org
당대 존재했던 흑인 노예 중 어쩌면 일부가 일본에 남았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설이기는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노예로 잡혀간 조선인이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좀 더 가서 2차대전에 참전했던 동아시아인(중국or한국)이 태평양 전선에서 포로가 된 후 다시 입대하여
미군 소속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록 이러한 일련의 설이 팩트라고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황 상 불가능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기에 16세기 일본에 흑인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컸고, 심지어는 기록 상 확인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바로 흑인 사무라이 야스케(弥助)이다.
위의 야스케에 대한 위키백과 문서를 보면,
야스케는 선교사의 노예로 일본에 왔으며 선교사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바쳤다고 소개되어있다.
이후 야스케는 약 15개월 간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며, 도구모치(道具持ち)로 삼아 창을 들고 자신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이후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등에 분명 야스케의 행적은 등장하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흑인이 사무라이 혹은 일본인과 유사한 대접을 받았으리라 추측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혼노지의 변에서 야스케는 오다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결국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붇잡혔고
아케치는 야스케를 보곤 '이건 (서양인들의)동물이며 남만사(교회)에 보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즉 일본인의 시각에서 야스케는 인간보다는 인간 형태의 짐승에 가까웠던 것이다.
야스케 외에도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흑인, 혹은 인도인에 대한 기사가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험한 일 하는 잡일꾼에 가까운 인상이 있다.
그렇다면 야스케의 입지는 적어도 일반적인 흑인보다는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창을 들고 오다 노부나가를 지키게 했다는 점과 혼노지의 변에서 사로잡혔다는 걸 생각하면
야스케는 '흑인 사무라이'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 부분에 있어 '사무라이'에 대한 조건과 설명이 추가되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전국시대 전반에 대한 연구를 한 적이 없어 이를 설명하기는 힘들다.
다만 정말로 야스케가 사무라이였다면, 이에 걸맞는 사회적 대우가 동반되어야 하는데(예를 들어 저택 하사)
아케치 미츠히데가 야스케를 짐승이라 표현한 걸 보면 야스케가 사무라이와 같은 사회적 대우를 받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흑인 사무라이'라는 표현은 증거가 부실한 감이 없지는 않아보이지만,
다르게 한다면 흑인 사무라이의 가능성이나 실재와 같은, 상상의 영역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왜곡하고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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