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임기는 1년을 못갔지만
7당을 연합이 무너진 것은 아니란 점, 그리고 일본신당이 보유한 유망주 정치인들의 면면을 생각한다면
분명 향후 일본신당에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내적으로 봤을 때, 호소카와 내각의 붕괴는 곧, 호소카와 모리히로 대표의 리더쉽에 대한 의문점을 제공할 여지가 있었다.
호소카와 내각이 붕괴하기 직전 오사와 사키히토를 필두로 3인의 중의원 의원이 탈당해 '그룹 청운'을 결성했다.
게다가 호소카와 총리의 사임 이후 한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에다노 유키오, 마에하라 세이지, 아라이 사토시, 다카미 유이치 4인이 일본신당을 탈당해 '민주의 바람( 民主の風 )'을 창당한다.
이후 그룹 청운과 민주의 바람은 신당 사키가케에 합류한다.
특히 이 중 에다노 유키오의 이탈이 치명적인데,
에다노는 시민변호사 이미지와 젊은 나이(일본신당 영입 당시 29세)로 일본신당의 향후 원동력이 되어줄 인사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연합이 해산 후 일부 인사가 일본신당에 합류하면서 의석수는 어찌저찌 채워지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탈당 러쉬에 대해 고이케 유리코가 전면에서 비판하는 등, 호소카와 총리의 리더쉽이 발휘되지 않는 면모가 보였다.
정국도 어수선했다.
7당 연합의 새로운 내각인 하타 내각은 장관 명단 제출 기한을 놓쳐 하루 동안 하타 총리가 모든 장관직을 겸임해야 했고,
7당 연합을 주도했던 신생당이 총리직을 먹어버리니, 일본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를 중심으로 反신생당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애초에 일사당은 민사당이랑 친한 신생당에 대해 어느정도 반감을 가진 상태였다.
결국 일본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를 필두로 7당연합은 와해된다.
이 사단을 해결하기 위해 하타 총리는 자신의 고향과 같은 자민당과의 연립내각을 구성하려 했으나
이대로 가만히만 있으면 정권이 공짜로 떨어지는데 굳이 자민당이 이걸 호응해 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에 대해 신생당 내부에서 반발이 컸고, 특히 하타 총리의 맹우인 오자와 이치로 역시 이견을 보이며
하타와 오자와 두 거물 간의 사이가 멀어진다.
결국 자유민주당을 필두로 내각불신임안이 국회에 제출된다.
여기에 일본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 심지어는 신생당 일부 인사마저 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결국 내각불신임권이 발동된다.
보통 내각불신임권은 발동 직후 국회해산권을 발동해 정국을 새로 시작시키는 식인데,
하타 내각은 이미 내각 내의 반목이 심했고, 결국 중의원해산권이 발동되지 못한다.
그 덕에 하타 쓰토무는 일본 유일의 탄핵 당한 총리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하타 내각의 붕괴로 총리 선거를 다시 진행했고,
부려 자유민주당과 일본사회당이 손을 잡는 기형적 정국에 신당 사키가케가 합류하는 자사사 연합의 탄생으로
일본사회당 대표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되며 7당 연합의 역사는 끝이 나게 된다.
글이 길었는데, 여기까지 겨우 64일이다.
두 달여 기간 동안 일본신당은 정권도 잃고, 유망주도 잃었으며, 리더쉽은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유망주는 유망주에 불과했고, 구심점이 애매해지자 분란만 커질 뿐이었다.
게다가 그 유망주 중 일부는 탈당해 신단 사키가케로 합류해 버렸다.
보수-혁신 체제의 붕괴라는 당의 색채, 즉 대중에게 어필할 만한 부분도 이제는 애매해졌다.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내각총리대신에 오른 지 1년여 기간 동안 일본신당은 수명을 다해버린 것이었다.
이제 일본신당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독자적으로 생존하려 노력하다가 조용히 해산하던가
아니면 다른 정당에 흡수 합병되어 새로운 이름으로 생존을 노리던가
그리고 어떤 방법을 노리던 일본신당이라는 이름과 형채를 유지할 수는 없다.
1994년
오자와 이치로와 신생당은 7당 연합의 문제점이었던, 하나의 정당이 아니었던 점을 해소하기 위해
7당 연합의 합당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4년 말, 신생당을 중심으로 일본신당, 공명당(공명신당), 민사당 등이 합당절차를 밟았고,
그렇게 신진당이 탄생한다.
일본신당 내에서는 신진당 합류에 반대하는 인사들도 있었으나 , 이들은 결국 일본신당을 탈퇴하게 되었다.
가이에다 반리를 필두로 4인의 중의원 의원이 탈당해 시민리그를 창당했으며,
이들은 이후 舊민주당 합류 전까지 군소정당으로 활동한다.
그렇게 일본신당의 이름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일본신당을 전설의 정당이라고 평가하는 세번째 이유
바로 짧고 굵게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기 때문이다.
자유민주당 독재와 55년 체제를 붕괴시키고 수립된 새로운 내각의 주인공이었고,
이 정당 출신의 정치인들은 주요 정당의 요직에서 맹활약을 하지만, 막상 일본신당의 존속기간은 짧았다.
이런 식의 짧게 존재했던 정당은 그 이름이 기억되기 상당히 힘들지만, 일본신당은 달랐다.
그 이름은 무조건 영원토록 일본사에 기록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일본신당을 전설의 정당이라고 평가하는 네번째이자 마지막 이유
어쨋든 일본신당이 3년 간 존재하며 만들어낸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예를 들어, 신당 붐 이후 일본사회당은 제1 야당의 이미지를 잃음과 동시에 중도 좌익의 성향이 옅어졌다.
자유민주당도 보수정당이라기 보다는 빅텐트의 가까운 모습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은 그간 자민-사회 양당과 그 외 정당(일공, 민사, 공명 등등)이라는 구도가 아닌,
별별 정당이 난립해 국회에 입성하고, 지역 정당인 일본유신회의 존재감도 생겨났으며,
당선자의 득표율이 20%도 나오는 다당제 국가로 전환된다.
이러한 면모의 시작점이 신당 붐이었고, 그 신당 붐의 시작이 일본신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신당을 가히 전설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세번째 이유와 네번째 이유를 합치면 요약하자면, '전설이니까 그리고 전설적이니까'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전설의 정당일본신당이었다.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더 조사해서다음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신진당 붐에 대해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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