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메이지 유신을 고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에는 내 주변 사람들의 (그들의 성향과 사상에 상관없이 나오는) 메이지 유신에 대핸 고평가나
내가 나름 공부하면서 민족적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한 것의 영향일 수 있겠다.
물론 한국인이 한국에서 메이지 유신을 고평가하는 것에는 민족적 감정이라는 벽을 넘어야 하기에
상당히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8년부터 1932년까지의 일본을 본다면
메이지 유신의 성과는 정말로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밖에 표현이 안된다.
다만 그 기간 동안의 위대하고 훌륭한 성과는 완벽하지 않았다.
나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성군'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양하게 되었다.
막말로, 군주가 완벽하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해도 그 속에서 파생되는 문제점이나 해결되지 못한 문제점이 있고,
그 문제점이 후대로 갈수록 확장되고 악화되며 결국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는 전통시대에서 언급되는 모든 성군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예외라고 한다면 청의 강희제 정도?)

물론 이러한 평가를 전제하는 것은 그 군주나 시대를 폄하하기 위함은 아니다.
다만 후대에서 그 문제점을 해결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었음에도, 혹은 해야 했음에도,
나은 결과가 나오지 못한다는 게 전통시대에 반복되고, 어쩌면 탈전통의 근대에도 발견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말을 많이 한다. 우리가 전통시대와 근현대를 비교하며 탈전통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곤 하는데,
나는 '근대 역시도 상당히 미개하다'는 평가를 자주 내린다.
어쩌면 일종의 과도기에 가까운 시대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를 조금 확장적으로 본다면 뭐 아직도 미개하다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선정과 위업을 이루었음에도 문제점이 발생했고, 그 문제점이 해결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거는 각 시대마다, 국가마다 경우가 다르기에 일반화하기에 상당히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 자체가 멸망이라는 결과를 관찰했고 기록한 결과를 받아들인 현대인의 시선에서 제기된 것이나 다름없기에
당대의 상황과 입장을 배격한 오류를 배출하기 쉽다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일종의 대몰락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 케이스마다의 특징에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메이지 유신을 숭상해보도록 하겠다.
메이지 유신이란, 1868년 메이지 덴노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일본이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만들어낸, 비유럽세계에서 탄생한 서양 근대 문명이자 그 창조 과정을 뜻한다.
동아시아라는 일종의 변방에서 탄생한 서양 문명이기에 그 창조 과정은 일종의 혁명으로 봐야하며,
그 혁명은 산업과 제도에 한정되지 않고 학술과 언어 등에도 엄청난 변혁과 발전을 이룩해냈다.
메이지 유신의 영향과 유산은 지금도 남아있으며, 일본을 넘어 한국, 중국, 대만, 동남아로 뻗어나갔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문명은 왜 멸망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서 줄곧 언급한 메이지 시대에 발생한 문제점과, 그 이후에 파생되거나 확장된 문제점을 방치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이 문제점들에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1932년 이전에는 문제점으로 인식되지 않았거나 문제점이라 할만큼 심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해결할 여지가 충분하기도 했고, 해결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 하여 당시 일본의 정치인과 지식인이 현실적 문제점을 방기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위대한 혁명의 수혜를 받아 위대한 혁명과 함께 성장한 엘리트였기에 그정도로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메이지 유신의 혁명은 두 방의 원폭 피해과 2차대전 항복이라는 참사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간 이룩해왔던 일본의 발전은 사라지고 미개함을 넘어 야만적인 일본으로 타락해야했다.
왜일까? 왜 그래야했을까?
내 개인적인 감상은 '시간과 여유가 부족했다'는 점, 즉 일단은 당대의 엘리트를 우선 비호하게 된다.
지금이 2025년이고, 관동대지진이 1923년, 대공황이 1927년에 시작되었다.
현대만큼의 학술적, 수단적 기반이 갖추어지지도 않았고 정보 교류나 시뮬레이션도 어려웠다.
이러한 노력은 차근차근 향후의 위기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닌, 당장의 긴급한 참사를 막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용될 수 밖에 없었다.
정부는, 정치는, 온갖 설득과 설명을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해야했고, 이를 성공시킬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이럴 때에면 결국 일종의 이상주의가 대중적 호응을 받게될 수 밖에 없다.
현실적 대안의 급한 상태에서 무형의 이상이 이를 이기고 발언권을 강화하게 되고
그 결과 채택되는 이상은 현실적 문제점을 악화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
나는 이를 '광기'라고 부르고 싶다.

이러한 광기는 현대에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광기가 정말로 광기라고 인식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보통 늦은 것이었다.
1934년 이후 쇼와 일본에 수많은 광기가 도사리고 있을 때, 그 누구도 여기에 브레이크를 가하지 못한 건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근대 일본은 이 광기를 제어할 마지막 기회마저도 너무나도 쉽게 놓쳤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그 원인 중 그 시대(1930년대 초)에 새로 생긴 원인은 하나도 없었다.
반대로 이전부터 있던 원인이 확장되고 악화된 경우는 수두룩했다. 그리고 그것이 메이지 일본을 멸망시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리틀보이와 팻맨은 메이지의 영광이 아닌 잔해 위에 떨어졌을 뿐,
이미 파괴되고 소멸한 것을 파괴시키고 소멸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메이지 유신으로 돌아가자.
메이지 유신은 언제 멸망했는가? 그리고 메이지 유신은 왜 멸망했는가?
전자에 대한 나의 생각은 "1932년 5월 15일 밤에 멸망했다. 1945년이 되기 전에 메이지 혁명은 이미 파괴 되어있었다."
후자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문제점과 이에 대한 대안을 논하기엔 시간과 여유가 부족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시작점은 쇼와대공황이었고, 그 자세한 과정을 거쳐 5.15 사건과 2.26 사건으로 이어지기까지
전전 쇼와를 논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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