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는 재난의 시대였다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전통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연호 겐로쿠(元祿)는 대지진(1704-겐로쿠16)과 함께 끝이 났고,
새로운 연호 호에이(宝永)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일본사 최강의 대지진이 일어났고(1707-호에이4),
같은 해 후지산의 역대 마지막 분화가 시작해 2년 간 지속되었다.
잊을만하면 대화재가 발생해 에도와 교토가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고,
전세계적으로 닥친 이상저온현상으로 잊을만 하면 대기근이 덥쳐왔다.
대화재 복구에는 세금이 쓰여야 하니 막부재정은 악화되었고,
대기근으로 공납할 돈이 없으니 잇키(一揆)가 군발적으로 발생했다.
막부는 이 사단을 해결하기 위한 화폐개혁과 정치 개편을 단행했으나 무엇하나 뚜렷한 성공을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막부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아게치령은 다이묘들의 불만만 늘렸고
결국 그 어떠한 개혁안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492년(메이오1)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상륙한 이래 유럽은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1705년(호에이2) 영국의 토마스 뉴커먼이 증기기관을 발명했고, 이를 기반으로 유럽의 산업혁명이 시작된다.
물론 유럽의 산업혁명이 정착되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는 1815년(분카11)이 되어야 하지만
이미 18세기 내내 유럽의 군사력과 국가생산력, 그리고 경제력은 아시아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일본은 그나마 유럽과 교류하던 국가였다.
1539년(덴분8) 포르투갈 상인이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이래 서양 상인 및 선교사들과 교류했고,
조총과 가톨릭은 물론 서양의 과학 기술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1633년(간에이10)부터 1639년(간에이16)까지 다섯차례에 걸친 쇄국령의 결과로
에도 막부는 네덜란드를 제외한 그 어떤 유럽국가와의 교류를 단절해버렸다.
일본이라는 훌륭한 시장을 유럽이 가만히 둘 리는 없었다.
1739년(겐분4) 러시아 제국은 탐험가 비투스 요나센 베링을 고용해 일본 연안을 측량했다.
최초의 흑선(이양선) 출몰로 언급되는 겐분흑선으로,
이 사건 이후 러시아, 영국, 미국의 통상 요구 혹은 연안 측량을 목적으로 한 접근이 적극적으로 변한다.
18세기를 거쳐 19세기가 되니 일본은 다양한 문제점을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정 부문에서는 무사들이 봉급에 대한 문제로 몰락하고 있었고,
대기근과 대화재로 파탄난 재정에 부정부패까지 발생해 문제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겠다고 진행시킨 개혁은 성과는 커녕 시작하자마자 번복되어야만 했고,
각 번에서는 국학, 유학, 난학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흑선의 출몰은 일상다반사인데, 이러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대처할 방안은 그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인 의사 시볼드가 지도 등 국외 반출 금지 품목을 반출하려다 체포되었고,
모리슨 호 사건 등, 막부의 부족한 서양 이해도로 난학자들은 한숨만 쉴 뿐이었다.
국내외로 정신이 없는 와중인 1842년(덴포12) 청이 영국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1844년(덴포14) 일본과 유일하게 교류하던 네덜란드의 국왕 윌리엄 2세는
일본에 특사를 파견해 막부에 개국을 권고하는 친서를 전했다.
막부의 대처는 흑선의 공격을 대비한 막부해군 설치가 전부였고, 포대나 대포, 함선 전부 서양의 공격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어쩌면 파탄난 재정으로 할 수 있는 건 이정도가 최선이었을지 모르겠다.
1846년(덴포16) 닌코 덴노가 붕어하고 사남인 고메이 덴노가 즉위한다.
1853년(가에이6) 도쿠가와 이에요시 쇼군이 병상에 누웠고,
쇼군 후계자인 이에사다마저 병약해 내부적 불안에 휩싸인 상태에서,
USS 서스케아나, USS 미시시피, USS 새러토가, USS 플리머스
네 척의 배가 우라가에 내항한다.
막말유신의 변혁기가 시작하게 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