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에이 6년 6월 3일(양력 1853년 7월 8일)
일본을 개국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함 네척이 대서양과 인도양을 건너 우라가(도쿄만)에 당도했다.
미국의 필모어 대통령은 매튜 페리 제독에게 일본의 개국을 명령했고,
필요시 무력행동까지 허가받았으며, 류큐와 오가사와라는 영토로 확보해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게 된다.
네 척의 배가 마카오에 도달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나가사키 봉행에 서신을 보냈고,
그 덕에 놀라워하고 불안해한 민중과 달리 에도 막부는 태연하게 대처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막부가 무얼 한 것은 아니었다.
구미세계와 동아시아의 격차는 단기간에 좁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좁힐 수 있다해도 당시 막부에게는 그럴 돈이 없었다.
막부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도쿠가와 이에요시 쇼군이 병상에 있어 국사를 논할 수 없으니 1년 후에 재논의하자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랜기간 일본을 노렸던 러시아제국은 부랴부랴 특임대사 푸챠친을 일본에 보냈다.
푸챠친은 일본의 개국을 위해 페리 제독과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페리 제독이 마카오로 퇴각하면서 푸챠친도 귀국하게 된다.
막부의 입장에서, 페리가 우라가에 돌아올 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다.
싸우면 진다. 청이 그랬듯 일본도 서양의 공격에 짖밟힌다. 그렇다면 개국할 것인가?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막부의 다이로 아베 마사히로는 막부 주요 인사와 논의했으나 답은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사태를 해결해야 하니, 아베는 도자마 다이묘에게도 그 의견을 물었으나 답은 역시 나오지 못했다.
교토로 가서 조정의 공경들과 덴노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답은 나오지 못했다.
일본의 군사조직으로써 적을 막을 방법을 구하기 위해 각계의 인사에게 의견을 물으니,
오히려 돌아온 것은, 막부가 외적을 막을 능력이 안된다는 현실이 일본 전국에 전해진 것이었다.
페리가 내항한지 19일만에 도쿠가와 이에요시 쇼군이 사망했다.
약속대로면 페리 제독은 1854년(가에이7-안세이1) 음력 6월에 다시 일본에 와야 하지만
약소국을 위해 그런걸 지키는 시대가 절대 아니었다.
1854년 음력 1월 우라가에 흑선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일본은 쇄국령의 원칙을 포기하고 페리 제독의 상륙을 허가할 수 밖에 없었고
시모다 료센지에서 미일 양측의 협상 결과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이 체결된다.
편무적 최혜국 대우와 시모다, 하코다테 두 항구의 개항을 주요 내용으로 한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고,
그렇게 일본은 개국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