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다이쇼7) 구니노미야 나가코여왕이 황태자비에 옹립되었고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그녀의 외가가 사쓰마번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이었기에 이를 기반으로 해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대두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왕은 육군 장교로 일하고 있었지만 해군 측에 친화적인 인사였고,
궁중 내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데이메이 황후가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극혐했기에, 야마가타파 육군의 지지를 받는 이치조 도키코와의 혼사를 거부했다.
표면화되는 육해군의 대립과 황태자비 옹립 문제
다이쇼 초반기는 2차대전기 일본의 핵심 문제점 중 하나인 육해군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물론 원래부터 육해군이 대립해온 것은 절대 아니었다.육군은 적진으로의 진격과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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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권한이라면 황태자비 정도는 충분히 번복시킬 수 있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명분이었다. 명분이 있어야 그 공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시마즈 가문과 관련된 기사 중, 시마즈 가문에 색맹이 있다는 점을 황태자비 교체의 명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대충 논리는 다음과 같다.
시마즈 가문은 색맹 유전자가 있는 등 문제가 있다.
이러한 유전자가 황실에 섞여 황실을 오염시킬 것이다.
따라서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의 황태자비 책봉을 취소하고, 이치조 도키코를 황태자비에 옹립해야 한다.
황태자비 교체론을 제기한 야마가타파는 스스로 가진 정치적 우위를 이용해 황태자비 교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우선 궁내대신 하타노 요시나오를 적합한 황태자비 절차를 밟지 않았다응 이유로 사임시켰고,
그를 대신할 신임 궁내대신에 야마가타파 육군인 나카무라 유지로를 추천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히로히토 친왕을 해외로 순방 보내버렸다.
이후 야마가타파의 공작은 투트랙으로 진행되었는데,
입헌정우회와 하라 내각에는 정책에 대한 무조건 호응 등을 댓가로 협상했고,
하라 총리 역시 정책 추진을 원활히 하기 위해 야마가타와의 관계 개선을 원했던 지라 황태자비 교체론에 호응해주었다.
귀족과 사이온지 긴모치에게는 황실의 현황과 향후 히로히토 친왕이 덴노에 오른 후를 대비한 것이라 설득했고,
황실의 권위를 최우선한 사이온지는 이에 호응하기로 약속하게 되었다.
그렇게 결국 사이온지 긴모치 당시 추밀원 원장, 하라 다카시 내각총리대신도 야마가타파의 논리에 호응했고
1920년(다이쇼9) 공식적으로 황태자비 교체를 건의하는 데에 이르렀다.
물론 정치는 황실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게 원칙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야마가타가 다이쇼 덴노 꼽 주던 시대에 뭔 원칙이냐는 것이다.
그럼 다시 한번 저 원칙을 읽어보자.
정치는 황실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
대일본제국헌법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대일본제국헌법 제3조
덴노는 신성하며 침해받아서는 안된다.
대일본제국헌법 제4조
덴노는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며, 이 헌법의 조항에 따라 이를 행한다.
당시의 시각으로 본다면, 애초에 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의 모든 정치가 덴노헤이카의 이름으로 하사된 것인데,
정치권은 감히 덴노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었다.
좋게 말하면 하극상, 나쁘게 말하면 역적행위를 저지른 것인데다가, 헌법정신까지 위배된다.
황태자비 교체론이 제기될 즈음, 황거에서 모종의 사건이 있다는 소문이 민간에 돌았고,
결국 국가주의자와 민당파를 중심으로 황태자비 교체 논란이 표면화되며 황태자비 교체 반대운동이 발생했다.
(당시 황태자비 교체를 반대하던 구니노미야 가문에서 궁중모중대사건을 도야마 미쓰루에게 유출시켜 버렸다)
명분은 위에 적힌 논리 그대로이다.
황태자비 교체 반대 운동은, 감히 덴노의 명을 거부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야마가타파 육군과 귀족,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다카시에 대한 큰 반발과 함께 그들에 대한 퇴진운동으로 확대되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퇴진운동은 평화로운 데모를 말하는 게 절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야마가타, 사이온지, 하라 등등의 집 우체통에 어느날 한편의 편지가 와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천주 예고장이었다. 더이상 황태자비 교체를 주장하면 죽이겠다는 직접적인 협박이었다.
여론이 악화되는 걸 넘어 천주 협박까지 오고 있으니 추밀원 내에서는 오히려 야마가타 아리토모에 대한 책임론이 부상했다.
이 책임론에 궁내성과 해군이 힘을 보탰고,
1921년(다이쇼10) 2월 다이쇼 덴노가 황태자비 교체는 없을 것이라 선언함과 동시에 궁내성에서 야마가타파가 전부 물갈이되었고
곧이어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사직서를 제출했다.
궁내성은 황실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 이 이후 황태자비 교체 논란을 은폐했고
그래서 이 사건의 이름은 황실에 있었던 어떤 큰 사건, 즉 궁중모중대사건이 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形有朋)
조슈삼걸 중 한명이자 메이지와 다이쇼를 대표하는 군벌 정치인이며, 초연주의와 메이지시대의 국가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군인칙유 작성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일본의 군인정신이라는 것은 이 사람이 만든 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의 설계자이었지만 일본 국내 정세를 조종한 막후 정치인이었기에
어쩌면 특정 정책을 추진하고 진행시키는 것보다는 그 정책에 차질을 빚게 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과도한 권력으로 일본의 입헌정치를 훼손했고 정당정치를 방해했으며,
게다가 여든이 넘으며 장수했기에 그가 미친 악영향은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토보다도 안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토만큼은 아니지만 야마가타도 한일합방에 기여한 게 없지는 않다)
그는 그 유명한 조슈 육군의 상징이자 리더였기에, 야마가타파를 중심으로 한 육군 내의 파벌 문화를 양산했으며,
능력보다는 야마가타파의 소속 여부가 육군대신, 대만총독, 조선총독 등으로 승진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식의 막대한 권력은 당연하게도 불만을 야기했고, 그 불만이 여기저기서 중첩되며
1921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추밀원 의원직을 포함한 모든 명예직과 정사직을 포기함과 동시에 낙향해 은거했다.
그리고 1922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야마가타의 죽음으로 초연주의는 붕괴양상을 맞이했다.
그렇다고 초연주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중심을 잡아주거나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뒷배가 사라진 게 되었고,
결국 2차 호헌운동으로 일본에 정당정치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한다.
아 여담으로
야마가타는 마지막 압박 같은 느낌으로 히로히토 친왕과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 간의 혼사를 어떻게든 지연시키려 노력했다.
그렇게 황태자의 혼사는 야마가타가 죽고 난 후인 1923년으로 예정되었으나 관동대지진이 발생했고,
비용과 여론 등의 이유로 미루어지다가 1925년 드디어 혼사가 이루어졌다.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은 고준황후가 되었고, 아키히토 상왕의 친모이자 나루히토 덴노의 조모가 되었으며,
나가토 여왕 대신 황태자비 후보로 언급된 이치조 도키코는 다른 집안에 시집가서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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