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의 하라 내각
하라 다카시. 일본의 19대 총리이며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함께 다이쇼시대 입헌정우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인물인데, 이유는 간단하다.原(하라)敬(다카시). 즉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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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쓴 글을 기반으로 보면,
하라 다카시 총리는 총리재임기 동안 그렇게 큰 활약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외정 면에서는 1차대전에 대한 정리와 중국 문제, 3.1운동 등의 임팩트가 강했고,
내정 면에서도 정책에 대한 부분보다는 국가주의나 궁중모중대사건처럼 하라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사건이 주목되곤 한다.
다만 그렇다해서 하라가 아무 것도 안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다이쇼8) 하라 내각은 모든 일본인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보통선거를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결국 귀족원과 추밀원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선거권을 얻을 수 있는 납세 제한을 낮췄다.
10엔 납부자에서 3엔 납부자로 바꾼 것인데, 대충 한화로 40만원 이상 납세자에서 18만원 이하 납세자로 전환된 것이라 보면 된다.
선거권의 확대와 보통선거의 도입은 민당파를 포함해 당시 주요 정당정치인들이 요구하던 것이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중의원에 민간의 여론이 더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정당정치인의 입지가 강화되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초연주의 번벌파와 귀족이 보통선거 도입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정당정치인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하라 내각에 시행된 정책을 보면 복지제도면에서의 제도 도입이 눈에 띈다.
소년법, 건강보호법, 결핵예방법이 제정되었고, 사회보장 방면의 의료 관련 복지제도를 만든 것이었다.
그 외에도 1921년(다이쇼10) 철도부설법이 제정되었고, 2차대전 이전까지 일본에 수많은 철도가 부설되었다.
내각철도원이 철도성으로 승격되었고, 철도성을 기반으로 일본 곳곳에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철도는 현존 사철회사의 전신이 된 것도 있고, 국유철도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화물철도와 여객철도가 부설되는 계기가 되어 지금의 철도대국 일본을 만들었다 봐도 무방했다.
전반적으로 하라의 정책은 당시 입헌정우회의 중립적인(번벌파와 민당파 간에서) 모습을 설명해주듯,
민당파의 의견과 번벌파의 의견을 조율하고 수용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하라 내각에 제시한 4대 정강은 다음과 같다.
1. 교육 시설의 개선 충실
2. 교통기관의 정비
3. 산업과 통상무역의 진흥
4. 국방의 충실
어쩌면 당시 번발파와 민당파의 의견에 현실적인 부가 내역이 붙은 느낌이 있지만
이것이야 말로 당시의 입헌정우회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하라 내각의 지지도는 높지 않았다.
하라 다카시는 사무라이 혹은 귀족 출신이 아닌 최초의 총리였기에 부임 초기에는 분명 서민층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태합의 비유할 만한 그의 성공스토리는 점차 기업과 유착되어있는 그의 행적과 함께 비판론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에 더해 유존사 등 국가주의자들은 시베리아 출병 등에 호응하며 하라 내각에 대해 거칠게 비판하던 중이었고,
그렇게 하라 내각에 대한 온갖 비판이 겹치며 내각지지율이 하락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탄생부터 재벌과 유착되어있던 입헌정우회의 특성과,
입헌정우회의 중립파스러운 성향으로 초연주의와 민당파 양측의 니즈를 채우지 않는 특성이 겹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락하던 하라 내각의 지지율을 나락으로 보낸 사건이 발생했다.
궁중모중대사건과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은퇴
1918년(다이쇼7) 구니노미야 나가코여왕이 황태자비에 옹립되었고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그녀의 외가가 사쓰마번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이었기에 이를 기반으로 해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대두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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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모중대사건.
황태자비 교체론에 호응한 것은 야마가타파만이 아니었다.
하라와 사이온지도 시마즈 색맹설에 호응했고, 하라는 다이쇼 덴노에 황태자비 교체를 건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행적은 윗글에도 나오듯 국가주의자들에게 역적 행위로 간주되었고,
하라는 천주의 타겟으로 지정되며 민당파와 국가주의자의 반발을 정면으로 받아내야했다.
궁중모중대사건은 다이쇼 덴노가 황태자비 교체가 무산되었음을 공포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은거에 들어가며
한 차례의 폭풍은 끝이 났지만
그렇다하여 국가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反하라 감정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1921년(다이쇼10) 11월 4일
하라 다카시 총리는 입헌정우회 교토지부 당대회를 위해 도쿄역에 도착했고,
평소 메모하는 습관이 있던 하라는 수첩에 '출발'이라는 두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 이는 하라의 유언이 되었다.
하라 총리가 도쿄역에 도착하자마자 극우 성향의 18세 소년 나가오카 곤이치가 달려들었고,
하라 다카시는 그렇게 칼에 찔려 사망했다. 일본사 최초의 현직 총리 암살 사건인 것이다.
(전직 총리의 암살까지 따지면 이토가 최초이다.)
피의자인 나가오카 곤이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조사 결과 단독 범행으로 확인되었지만
국가주의 단체의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란 게 학계의 정설이다.
나가오카 곤이치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감형되어 1980년까지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도쿄역에 가면 하라 총리가 습격당한 그 자리에 해당 사건에 대한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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