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에 조민(中江兆民)
도사번 출신으로 도사번의 파견 유학생이 되어 나가사키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으며,
그 시기 나가사키에 머물던 사카모토 료마의 휘하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썰이지만 료마의 담배를 심부름을 했다나 뭐래나
프랑스어가 가능했던 덕인지 이와쿠라 사절단에 유학생 자격으로 참여했으며
그대로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그게 이 인물의 특징을 만든 가장 큰 계기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1870년대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퇴진과 함께 새로운 자유주의가 휘몰아쳤고
이는 분명 유학생 나카에 조민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는 주요 자유주의 사상가를 배출한 국가이자 자유주의 혁명의 시초격인 국가였다.
이런 곳에서 배운 것을 활용해 귀국 후인 1882년(메이지15)
나카에 조민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번역한 민약역해를 발간했다.
민약역해 등 나카에 조민의 저서는 자유민권운동의 지침처럼 활용되기도 했다.
1890년(메이지23) 시행된 첫 중의원 총선거에서 나카에 조민은 부라쿠민을 위해 일하겠다며 오사카 4구로 출마했고
거기서 당선되었다.
유학에서 귀국한 이래 정부 관료와 정치에 대해 날카로운 펜 끝을 보여준 나카에 조민이었기에
그의 사상과 행적에 자유민권파는 감화되었고 특히 노동운동계, 사회주의자들이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그의 필명을 물려받은 메이지시대 공산주의의 대표주자
고토쿠 슈스이(古徳秋水)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1889년(메이지22) 일본 최초의 노동조합 동맹진공조가 출범했다.
일본의 산업화에 힘입어 급증한 노동자들은 이후 각 분야의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이는 1895년(메이지30) 노동조합기성회라는 중앙단체로 결집되었다.
노동자들의 시위는 곧 국가적 입장에서 발전과 방해할 요소라고 판단되었고,
애초에 이런 식의 의견 분화는 초연주의 번벌파 입장에서 곱게 보일 요소가 아니었다.
노동운동은 수차례 탄압받았고, 집회를 저해하는 수많은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공산주의의 바이블인 '자본론'은 1848년(가에이1) 저술되었다.
흑선 사건이 1853년(가에이6)이니, 자본론이 일본에 번역되어 오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막말 일본이 존황양이를 새시대의 정치 이념으로 확보하고 나서야 겨우 사회주의가 일본에 도착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일본의 사회주의는 자유민권운동으로 유입되어 노동운동에 차용하며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편하다.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은 일종의 특징이 있는데, 바로 기독교도(가톨릭)였다는 것이었다.
가타야마 센, 아베 이소오 등은 노동자의 사회적 대우 등의 사회문제를 기독교 교리와 연결지어 해결하고자 했다.
그렇게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의 필두에 섰고, 당연히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1900년(메이지33) 입헌정우회가 창당되었다.
자유민권운동, 자본가, 번벌파 관료의 혼합이라는, 자유민권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기형적인 형태의 정당이 탄생했고,
이는 자유민권운동과 사회주의가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필두에 선 것은 당시 만조보에서 칼럼을 운영하던 고토쿠 슈스이였다.
당시 만조보는 황색언론이라는 점 때문에 잘팔리던 신문사였고, 그 주필로 있었던 고토쿠는 이 점을 이용해 정치인들에게 디스를 갈겼다.
그리고 그 디스의 정점이었던 것이 바로 입헌정우회 창당을 까는 '자유당 제문'이었다.
이름 보면 알 수 있듯 구 자유당계를 까는 글로, 그 시작도 '아아 자유당은 죽었구나'로 시작한다.
고토쿠의 펜촉은 가려진 것들을 향해 날카롭게 빛났다.
아시오 광독 사건에 대한 상소문을 작성했고, 의화단 운동 도중 육군 중장 마나케 아카리의 마제은 횡령 혐의를 고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토쿠 슈스이는 점차 가타야마 센, 아베 이소오 등과 교류했고,
그들은 사상적 공통점을 향유하며 1900년 사회주의 연구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1년 후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사회민주당이 창당되었다.
물론 하루만에 해산당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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