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화되는 육군의 쿠데타, 그리고 근대 일본의 아쉬운 대처

2025. 4. 17. 18:5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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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군법'이라는 존재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물론 이게 법이나 사상에 논리적으로 근거한 원칙 기반의 혐오감은 아니다.

그리고 군대라는 조직사회는 일반적인 사회와 다른 특수한 조직이고 사회라는 점은 충분히 인정한다.

다만 이 군법의 존재로 인해 나오는 폐단이 있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버닝썬 사건 이후 관련자들이 입대하여 처벌의 수위를 낮추었다던가 그런 것이 있겠다.

 

근대 일본의 경우도 맥락은 비슷하다.

심지어 당시의 군법은 뭐랄까...형법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법으로 작동했고 그렇기에 이에 따른 비논리적 징계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비논리적 징계를 제대로 표현하자면 솜방망이 징계가 적절하겠다.

형법이 적용되었더라면 사형,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징역이 나왔어야 할 사건들이

길어봤자 징역 3년, 심지어는 제대 조치나 무혐의를 받으며 제대로된 처벌 없이 끝난 경우도 흔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솜방망이 처벌이 일본 육해군, 특히 육군의 광기를 가속화시켰다고 생각한다.

특히 육군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러한 사건들이 대부분 육군에 의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게 법치주의인가? '극동의 문명'에 부끄러울 일이 아닐까?

 

관동군의 무책임한 자율성과 황구툰 사건

관동주 관동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삼국간섭과 아관파천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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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라 간지

황구툰 사건으로 고모토 다이사쿠와 같은 관련자들은 일단 직무에서 해제되었다.

물론 그렇다하여 제대로 된 법적 처분이 가해진 것은 아니고, 고모토와 같은 핵심 실행자들만 징계를 받고 끝냈다.

그리고 그 징계라고 해봤자 예비역 전역 조치. 그리고 예비역이 되어 만철에 스카웃되면 직책만 바뀌고 직무는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관동군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관동대지진 당시 오스기 사카에를 살해한 아마카스 마사히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가메이도 사건으로 공산주의자와 부라쿠민 학살한 헌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들은 전부 전역 후 만주로 이동했다. 관동주의 행정 관리나 만철에 스카웃되었고,

관동주와 만철의 공작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니 제대로 된 처벌이 아님은 분명하다.

 

한편 황구툰 사건으로 관동군은 일단 인사 개편을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인사 개편으로 이시하라 간지가 일본 본토에서 관동군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시하라 간지는 당시 육군 중에서도 최악의 강경파 중 한명이었고,

그가 생각하는 이상이란 동서양의 전쟁 끝에 현인신 덴노헤이카가 이끄는 일본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상당히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이시하라는 의외로 굉장히 논리적인 사상가였어서

동서양의 세계 최종전을 위하여 아시아가 일본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하고, 그 기반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도 설명해 낸 인물이었다.

그래서 전후 적군파가 이시와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

 

이시와라 간지는 꽤 논리적인 설명을 설파할 수 잇는 사람이었기에, 관동군의 장교들은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타가키 세이지로, 츠지 마사노부 등이 이시와라의 의견에 동의해갔고, 그렇게 만주파가 형성되었다.

다만 이 만주파는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이시하라가 1930년대 중반 관동군 참모장에게 간언하다 제대로 찍혀버리면서

만주파는 조용히 통제파로 흡수되었다.(애초에 이시하라 간지도 통제파와 관련이 있었다)

참고로 그때 참모장이 누구였냐?

도조 히데키

황구툰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시하라 간지를 중심으로 관동군의 과격성이 강화되어가던 그 때

일본 본토에 육군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줄곧 언급했듯, 사조직을 만들어 자신들만의 사상을 전개 및 확대시켜 나갔고

향후 대미, 대영, 대소 전쟁을 준비하고 중국을 일본의 영토로 확보하기 위한 이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별의 별 사조직이 다 있었다. 통제파의 소굴이었던 목요회, 도조 히데키가 세운 일석회 등등등.

 

1930년(쇼와5) 육군 중견 간부들을 중심으로 도쿄에서 사쿠라회가 조직되었다.

하시모토 긴고로 등이 중심이 되어 수립한 사조직이자 지하조직이었고,

1930년대 사쿠라회는 그 어떤 사조직보다도 실천주의적인 면이 돋보였다.

이들은 오카와 슈메이, 이노우에 닛쇼, 니시다 미쓰기, 기타 잇키 등의 국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국가주의자들이 이끄는 민간단체와 협력해 쿠데타를 모의했다.

다만 이 쿠데타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쿠데타가 성공했을시 옹립할 새로운 지도자를 상급 장교 중에서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1931년(쇼와6) 3월 이 혐의가 들통났고, 결국 쿠데타는 무산되었다.(3월 사건)

아라키 사다오

1931년 4월 결국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총리대신이 사임했고, 입헌민정당 대표 와카츠키 레이지로가 대명강하되었다.

2차 와카츠키 내각이 수립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쿠라회는 드디어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지도자감을 육군 내에서 찾아냈고,

육군 중장 아라키 사다오를 총리로 추대하여 만주사변의 성과를 확대하고자 했다.

아라키 사다오는 기타 잇키 등 국가주의자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던 인물이었고,

한때 우가키 가즈시게에 의해 '젊은 장교들을 선동시킬 인물'로 낙인 찍혀 한직으로 쫒겨날 뻔 했으나

당시 통제파측 육군들이 아라키가 우가키 가즈시게보다는 낫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탄원시켜 중앙에 남았던 인물이었다.

강경파였으니 사쿠라회에 의해 쿠데타 이후 추대할 내각총리대신으로 채택되었으나 이 쿠데타는 발각되었고,

아라키 사다오 본인마저 사쿠라회를 설득하며 쿠데타는 결국 무산되었다.(10월 사건)

지하조직이었던 사쿠라회는 이 10월 사건으로 표면화되며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고,

당시 주요 가담자들은 헌병대에서 융성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다가 나왔다.

 

헌병대 입장에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같은 편이고 당시 유망하고 유능하다 느껴졌던

사쿠라회 소속 장교 도미나가 교지, 츠지 마사노부, 무타구치 렌야 등을 전역시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데 저게 유망해? 유능해?

 

이런 식으로 솜방망이 처벌을 반복하니, 어쩌면 육군은 이제 어떤 행위를 해도 상관이 없는

고삐 풀린 말처럼 미쳐 날뛸 준비가 완료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육군 강경파가 혐오했던 온건파 정치인들, 전장에서 그들의 지휘를 받아야했던 군인들이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정말 이걸 사전에 차단하고 방지할 방법이 도저히 없었을까?

아무리 일본 군대가 비교적 자율적인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비논리적이다.

이타가키 세이시로

한편 관동군은 1931년 이타가키 세이시로를 중심으로 만주와 내몽골에 대한 정보를 집약시켰고,

이타가키 세이시로, 혼조 시게루, 이시하라 간지 등은 봉천군벌과의 전쟁만이 만몽을 확보해 일본을 번영시킬 방법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의견은 본토의 육군 사조직, 특히 사쿠라회 역시 크게 공감했던 것이었다)

1931년 9월 관동군은 만철의 아마카스 마사히코와 함께 일종의 자작극을 계획했고

1931년 9월 18일 펑톈 인근 류탸오후에서 만철 소유의 철도가 폭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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