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 쇼와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혹은 전전 쇼와를 평가하기 위한 시선이나 방향성은
전반적으로 두 차례의 원폭 피해와 2차 대전 패배에 맞추어져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근대 일본은 왜 실패했는가?
2. 근대 일본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근대 일본의 실패에 있어 그 직접적인 원인이 군부의 광기임은 좌우, 일본 국내외를 막론하고 동의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광기를 제어할 여지가 아예 없었는가?
아니면 이 광기를 유화시킬 기회는 없었는가?
이 부분에 대한 담론은 193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만주사변과 정당협력
1931년(쇼와6) 2차 와카츠키 내각이 출범했고, 하마구치 내각의 시기와 와카츠키 내각의 시대를 합쳐서 생각해봤을 때와카츠키 레이지로는 총리로 짬을 맞고만 살았다고 생각한다.1차 와카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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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구툰 사건과 만주사변은 군부의 광기에 있어 그 시작점으로 여겨지는 사건이다.
그리고 황구툰 사건은 그 존재만으로 만주사변으로 이어지는 필연성을 설명하는 광기 그 자체인 사건이다.
만주사변의 성과는 만주국의 성립으로 이어졌고,
만주를 일본의 이권 안으로 합병한다는 이상은 이로 인해 성사되었다.
이 성과는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입지를 독선적으로 바꾼 사건이었고,
이후 국제연맹의 리튼 보고서를 일본이 무시해버리고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일본은 외교적으로 비타협적 자세로 돌변했다.
그리고 이는 잘 알려져있듯,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자주 강조하지만, 일본에게 만주는 이상이었다.
만주를 획득하면 수많은 자원이 일본의 손에 들어올 것이고, 이는 일본의 산업에 큰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일본이 비교적 저렴하게 자원 비용 문제를 해결하면 일본의 산업에는 새로운 성장 원동력이 생길 것이고,
이는 노동 문제나 일자리 문제를 해소하고 일본의 내수경제를 살릴 희망이라 여겨졌다.
딱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실제로 만주는 철광석이 풍부하고 석탄, 석유도 있어 일본에는 분명 도움될 지역이었다.
이 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내용이며,
게다가 입헌민정당, 입헌정우회, 국가주의 단체, 민당파 등등 대부분의 정치사회적 시선에서 공감하고 있던 것이었다.
일례를 들어보겠다.
1930년대 후반 군부에 의해 정계에서 배척된 관료, 문관 인사들은 언론지에 논설을 싣고 연구회에 모이며
재야에서 자체적으로 활동했다.
이 재야인사들은 제국의회에 당선되지 못했던 입헌민정당-입헌정우회계열의 인사들이나 비판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시데하라 기주로, 이시바시 단잔, 기요사와 기요시 등이 있었다.
결국 중일전쟁이 발생했고, 이 전쟁은 태평양전쟁이라는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던 1930년대 말,
시데하라, 이시바시 등은 일단 이 사단의 원인이자 시발점으로 만주사변을 제시했다.
특히 시데하라의 경우 대중국 공작 활동을 기반으로 한 협조 외교로,
심지어는 장쉐량을 축출하고 만주에 친일 정권을 전쟁 없이 수립해 만주와 내몽골을 중일 양국의 관리 하에 두는 계획을 짜기도 한,
당시 군부와 관동군의 적극정책과는 완전히 다른 기조에 있던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들이 본 만주사변은 어떻게 평가될까?
군부에 의해 정계에서 배척당했던 인물들이었음에도 의외로 만주사변 자체의 성과는 상당히 고평가했다.
만주와 내몽골을 일본의 이상향적 목표로 두는 점은 어쨋든 군부의 적극노선과 시데하라 외교 간의 공통점이었고,
그렇기에 만주를 획득해낸다는 성과를 보인 만주사변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데하라는 만주사변에 대해 정확히 이와 같이 평가했다.
군부가 만주사변에서 멈췄더라면 이는 훌륭한 성과임은 분명하다.
다시 생각해보자. 시데하라 기주로는 만주사변의 영향으로 2차 와카츠키 내각이 붕괴하며 외무대신직에서 물러났고,
이로 인해 일본의 외교 시스템에서 밀려나 2차대전 종전 전까지 공직에서 완전히 배제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시데하라가 만주사변과 만주국 수립에 대해 좋게 평가한 이유는 간단했다.
협조 외교 노선에 있어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되지 못했음을 시데하라 본인마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종의 이상적 노선 방향성은 분명히 세워놨지만, 그 구체적인 실행안을 설계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 실행안의 부재는 시데하라의 뒤를 이어 대중국 노선을 설정한
시게미츠 마모루나, 시게미츠의 외교 정책을 비난한 기요사와 기요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전쟁 이외의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기에, 이들의 행적은 일종의 탁상공론에 불과했고
따라서 현실적 장벽을 일거에 무너트리며 만몽으로의 확장이라는 이상향에 당도해냈기에
만주사변과 그 결과물에 대한 비판은 '과도한 확장'과 '민간 외교의 배제'에 있었지,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상 실현 자체는 큰 이견 없이 받아들여졌다.
결국, 전쟁 이외의 구체적 대안을 내지 못한 협조 외교 노선은 현실 정치에서 설 자리를 잃었고,
군부는 강경함을 통해 실질적 성과를 만들어내며 오히려 일종의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렇다하여 시데하라 기주로, 이시바시 단잔 등이 만주사변을 마냥 칭찬한 것은 아니었다.
만주사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곧 '거기서 멈췄다면'이라는 전제를 동반한 조건부 평가이기도 했다.
만주사변의 진행과정을 보면, 하루만에 펑톈이 함락되었고, 며칠만에 남만주가 관동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의 적은 일본이 후진적이고 낙후된 국가라고 보았던 중국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진국인 미국, 영국, 소련도 해내지 못한 성과를 저평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성과는 후진국과의 전투에서 나온 성과이지, 선진국과의 전투에서는 양상이 달라질 여지가 컸으며,
애초에 일부 지역을 장악하는 데에 효과적이었지 국가나 대륙 전체를 확장 가능한 모델일지는 불분명했다.
여기에 더해 중국 전체를 삼킨다는 방향성으로 간다면
그 이후 구미 열강의 반발로 발생할 난관을 당시 일본의 그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로 국제사회 차원에서의 견제 등 새로운 문제가 일본에 발생했음에도 정치와 외교 정책에 있어 확장주의 적극론은 유지되었다.
국제사회의 견제는 외교 고립과 더불어 다양한 문제점을 파생시켰고,
결국 만주국 수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대중국 적극 외교와 일본식 고립 외교의 주체자 시게미츠 마모루마저
현실적인 이유로 결국 협조 외교 노선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온건하고 유화적인 정책을 반영하고 이해해줄 정치인과 군인은
5.15 사건과 2.26 사건을 거치며 모두 죽거나 정계에서 축출된 상태였다.
시데하라는 5.15 사건 이전에 이미 재야에 있었고, 시게미츠도 2차 대전이 본격화되며 입지 밀려났다.
그리고 군을 비판하는 행위가 반국가적 행위로 규정되니,
젊은 장교들의 눈 밖에 나 천주의 위협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이견을 숨기며 침묵하고 눈치만 보는 쪽이 나았다.
그렇게 군부에 대한 견제는 점차 사라져갔다.
여기에 더해 군부의 이념적 한계와 능력 한계도 있었다.
군부는 자신들의 이익과 정치적 입지, 그리고 젊은 장교들의 혈기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
향후의 정책 방향성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2차 대전 중 정신력이나 무사도를 강조하는 전근대 자세도 서슴치 않았다.
게다가 만주사변의 성공은 군부에게 '우리가 옳았다'는 신념을 강화시켰고,
1차 대전이후 일본의 전투 경험 부족과 유럽의 군사력에 대한 지식 결여는 만주사변의 빠른 성과에 도취되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 결과 일본의 군부 중심 정치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향보다는 밀어붙이는 데에 집착했고,
이로 인한 문제점은 2차 대전 중에 부각되어 해결하기에는 늦은 시점에서야 파악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시데하라 기주로 등은 만주사변에 대해 '멈췄더라면 훌륭했다'는 식으로
제한된 조건 하에서만 그 성과를 인정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군부의 독주는, 누구도 멈추지 않았고 군부 스스로조차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만주사변은 일본 군국주의의 자양분이 되었고, 파국으로 향하는 실패의 출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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