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해금과 본격적인 군축 정책
1929년(쇼와4) 다나카 기이치가 총리직에서 사임했고,제국의회 중의원을 장악하고 있던 입헌민정당의 대표 하마구치 오사치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분명 정우회와 민정당, 두 정당 간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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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군축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해군에 대한 것, 즉 런던 군축 조약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이렇게만 보면 육군은 빗겨나간 것 같은데, 사실 육군도 해군에 준하는, 어쩌면 더한 군축이 가해졌다.
근데 이걸 왜 저기서는 언급 안했냐? 육군에 대한 군축, 즉 우가키 군축이 꽤 중요해서 그렇다.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일본의 육군 정치인과 조선 총독 중에서는 그나마 내가 좋게 평가하는 편인 인물이다.
이해가 안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유를 설명하자면
육군 출신 정치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다나카 기이치,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선녀가 아닌가?
우가키는 전반적으로 포용적이고 온건하며 현실적인 정책을 선호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이후의 이야기이지만 조선 총독으로서는 사이토 마코토의 문화통치를 한 단계 더 강화하여
완전한 내선일체를 이룩하여 일본 입헌군주정 수혜를 조선에도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물론 탄압을 안했다는 건 아니다. 참고로 우가키의 후임 조선 총독이 미나미 지로, 그 다음은 고이소 구니아키 였다.
그래도 그나마 온건했고 포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면모는 육군대신으로서 더욱 부각되는 것이기도 했다.
우가키는 기요우라 내각, 가토 다카아키 내각, 1차 와카츠키 내각의 육군대신을 역임했고,
1차 와카츠키 내각이 붕괴된 후 제네바 군축 회담의 대표로 자리를 비운 사이토 마코토를 대신해 임시 조선 총독을 맡았다.
당시 우가키는 그대로 정식 총독에 취임하기를 원했으나 다나카 기이치가 자기 파벌인 야마나시 한조를 낙하산 태워서 무산되었다.
이후 1929년(쇼와4) 하마구치 내각의 수립과 함께 육군대신직에 복귀했으며,
이전 임기에서 추진했던 군축을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그 군축안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어쩌면 런던 군축 조약보다도 더 강한 군축안이었다.
대충 내용은 이러하다.
육군 4개 사단을 포함해 육군의 숫자를 대거 감축하고, 그 대신 전차연대, 포병연대, 비행학교를 설립한다.
군축은 군축대로 진행하며 군사력은 다른 방식을 통해 최대한 유지한다는 꽤 현실적인 감축안인데,
우가키는 육군이다.(조슈 출신은 아님+야마가타파 아님) 이걸 감안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군축안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어찌 보면 현실 문제를 육군에만 책임을 물리는 식이기 때문에
육군은 이때 우가키에 대해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고, 우가키를 비난했다.
이는 우가키의 정치 인생에 큰 장애물로 작용하게 되었다.
우가키 군축과 런던 군축 조약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제시된 것이었다.
당연히 육군이고 해군이고 작정하고 이를 거부했고, 귀족원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당이 된 입헌정우회 역시 하마구치 내각의 적극적인 군축에 대해 비판해나갔다.(대표적으로 이누카이 츠요시가 그러했다)
여기에 가속도를 붙힌 것이 바로 '통수권 우범 문제'였다.
대일본제국 헌법 11조
덴노는 육해군을 통수한다
대일본제국 헌법 12조
덴노는 육해군의 군제 및 상비병액을 정한다
이를 근거로 육군과 해군은 하마구치 내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리로 비난했다.
육해군의 통솔권 및 그 병력의 규모를 정하는 것은 덴노헤이카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하마구치 내각은 덴노의 명령 없이, 그리고 이를 어기고 육해군을 억제하려 하고 있다.
이는 덴노의 통수권을 무시한 통수권 우범 행위이다.
당시 런던 군축 조약을 거칠게 거부했던 해군 함대파와 우가키 군축에 격렬히 저항한 젊은 장교들의 사조직은
이러한 통수권 우범 문제를 근거로 하마구치 내각을 반역자로 설정했고, 이어 하마구치 내각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육군 사조직 내에서는 쿠데타를 준비했고, 해군 함대파 내에서는 군정 조직 설치 및 정권 장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국을 보며 일본 해군의 GOAT 도고 헤이하치로가 직접 해군에 군정 설치와 같은 행위를 하지 말라 말했고,
대중적으로도 긴축 경제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 육해군의 통수권 우범 문제에 비판을 가해나갔다.
여기에 더해 사이온지 긴모치를 중심으로 추밀원에서 런던 군축 조약에 대한 덴노의 비준을 찬성하면서
통수권 우범 문제는 잠잠해져 갔다.
라고 방심할 때 천주(天誅)의 나라 일본에서 결국 사단이 났다.
1930년(쇼와5) 11월 14일,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총리대신은 오카야마의 육군 부대를 방문해 훈련을 시찰하기 위해
도쿄역으로 가 기차를 탈 예정이었다.
그러자 극우 국가주의 단체 애국사의 단원이었던 사고야 도메오가 하마구치 총리를 습격했고,
당시 60세였던 하마구치 총리는 사고야가 쏜 총을 맞고 중태에 빠지게 되었다.
위 사진이 습격당한 직후의 모습이며, 사진 가운데 고개를 안경 쓴 노인이 하마구치 오사치이다.
하마구치처럼 도쿄역에서 습격당한 하라 다카시와는 달리, 하마구치는 대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살았지만,
그렇다하여 정무로 돌아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내각총리대신직은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이 임시로 맡게 되었다.
당시 국가주의, 육해군 강경파가 하마구치 내각에 품은 불만은 다음과 같다.
우가키 군축, 런던 군축 조약,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시데하라 기주로의 대중국 협조 외교였다.
이건 우가키 군축만큼 중요한 것이기에 여기서는 제외했고,
임시 총리가 된 시데하라를 이야기하며 언급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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