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쇼와6) 2차 와카츠키 내각이 출범했고, 하마구치 내각의 시기와 와카츠키 내각의 시대를 합쳐서 생각해봤을 때
와카츠키 레이지로는 총리로 짬을 맞고만 살았다고 생각한다.
1차 와카츠키 내각은 2차 호헌운동 이후 입헌민정당(당시에는 헌정회)과 입헌정우회 간 경쟁 구도에
가토 총리 병사+다이쇼 덴노 붕어+쇼와대공황이라는 3콤보가 닥쳐왔던 상태였다.
그리고 그 난관 속에서 귀족원이 작정하고 입헌정우회의 다나카 기이치를 밀어주면서 붕괴했다.
2차 와카츠키 내각도 비슷했다.
황구툰 사건+대공황+군축 논의라는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며 내각을 괴롭혀왔는데,
육군은 육군대로, 입헌정우회는 입헌정우회대로 비협조적이었고,
결국 만주사변이라는 괴상한 참사를 맞닥뜨려야 했다.
물론 그렇다해서 2차 와카츠키 내각을 지원해줄 기반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마구치 내각 출범 이후 치뤄진 17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입헌민정당은 273석을 획득했고,
반면 정우회는 174석을 얻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육군 군축의 핵심인 우가키는 조선으로 이동했지만,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대장대신으로, 시데하라 기주로가 외무대신으로 잔류한 상태였다.
모든 기반이 갖춰져있는데 무엇이 문제였냐?
솔직히 평가하자면 억까가 심각했다.
표면화되는 육군의 쿠데타, 그리고 근대 일본의 아쉬운 대처
개인적으로 나는 '군법'이라는 존재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물론 이게 법이나 사상에 논리적으로 근거한 원칙 기반의 혐오감은 아니다.그리고 군대라는 조직사회는 일반적인 사회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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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관동군은 반중 감정 고조를 유도하기 위해 온갖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일본에 반중 여론을 만들어 향후 있을 중일 간의 전쟁에 있어 그 역효과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가 봉천군벌에 체포되어 사형당하는 '나카무라 사건'이 있는데,
봉천군벌은 관동군이 심어놓은 스파이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를 체포해 죽인 것이었지만
관동군과 일본 육군은 이를 일본에 대한 공격으로 알리며 '대만몽(滿夢)의 위기'라고 여론 공작을 벌였다.
그 외에도 관동군은 조선총독부와 협업하여 조선인 농민 180명을 만주로 이주시켜 만주를 개척했는데,
이는 결국 원래 살고 있던 중국인과 새로 이주한 조선인 및 일본인 간의 갈등을 유발해
결국 무력 사태(만보산 사건)로 이어졌다.
그런데 만보산 사건에 대해 왜곡된 보도가 조선에 전해졌고, 결국 조선에서 화교 학살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노력했음에도 아직 중일 간 새로운 전쟁은 일어나지 못했다.
애초에 이건 기반을 닦는 것에 불과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이에 따라 일본 역시 현실적으로 금 해금은 의미가 없다 판단하여 금 해금 조치를 철회시켰다.
이런 식의 정책을 그려나가던 와카츠키 내각이 수립한 지 약 5개월
1931년 9월 18일 류타오후의 철도가 폭파되었다.
관동군에 의해 조작된 폭파 현장은 류타오후 사건이 봉천군벌의 행각임을 알렸고,
관동군은 일본의 재산 보호를 위해 봉천군벌의 북대영을 공격했다. 만주사변이 발발한 것이었다.
와카츠키 내각은 이러한 관동군의 행각을 중지시키기 위해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관동군은 이런걸 무시하고 봉천군벌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결국 내각은 관동군에 대한 지원병 파견을 거부했고, 조선군에도 파병 금지 명령을 내렸다.
조선 총독이 내각과 관계가 있는 우가키 가즈시게였기에 막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조선군은 총독부가 아닌 조선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군대였다.
물론 내각이 가지 말라했지만 육해군의 통수권은 덴노 거지 총리 게 아니다.
1931년 9월 19일. 류타오후 사건으로 만주사변이 발발한 그 다음날
하야시 센주로 조선군 사령관에 의해 조선군은 덴노의 재가를 받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관동군과 조선군은 순식간에 펑톈을 포위했고(애초에 관동군 사령부가 펑톈에 있었다), 9월 20일 펑톈이 관동군의 손에 떨어졌다.
9월 21일 지린성을 지키던 봉천군벌의 부대가 항복했고 그렇게 남만주 전역이 일본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패주한 봉천군벌은 그대로 베이핑(베이징)에서 머물고 있던 장쉐량에게 이동했다.
대충 36시간만에 육군의 만행이 성과를 거두었지만, 시데하라 기주로 등은 이러한 관동군의 행각에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미나미 지로 육군대신이 사임해버리면 내각이 그대로 터져버리기에
일단 2차 와카츠키 내각은 육군을 달래는 식의 선택을 취하게 되었다.
우선 특별 예산으로 군비를 추가하고 관동군을 치하하고 달래 만주사변을 끝내는 것이었다.
일단 온건하게 받아줄 거 받아주고 처리를 생각하는 온건한 선택지였지만, 관동군은 여기서 진군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얼마안가 텐진 일본인 거류지에서 보호받고 있던 선통제 푸이가 관동군에게 이동했다.
장쉐량은 우선 남은 군대를 진저우에 집결시켰고,
구미열강의 외교적 압박을 통해 만주사변을 처리하는 수비적인 방법을 취했다.
(당시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전쟁 및 내부 쿠데타로 여력이 없었다)
실제로 국제연맹은 만주에 리튼 조사관을 파견했고 1932년(쇼와7) 일본군의 만주 철수를 명령했지만
국제연맹은 이미 그 어떠한 권위와 능력이 없는 집단이기에 일본(당시는 사이토 내각)은 리튼 보고서를 무시하고 말았다.
결국 만주사변에 대한 수비적인 장쉐량의 태도는 그 어떠한 효과도 보지 못했고,
1932년 진저우가 결국 함락되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장쉐량은 지금도 무능한 이미지가 강하다.
이시하라 간지 등 관동군의 주요 인사들은 창춘에 모여 향후 만주 통치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만주 통치에 잇어 그 기치로 이시하라 간지는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제시했는데,
다섯 민족(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만주족, 몽골인-혹은 러시아인)이 힘을 합쳐 살아가자는
말로 하면 상당히 좋아보이는 뜻이겠다.
그런데 만주사변은 너희 이득만을 위해 시작한 사건 아니니?
심지어는 1932년 창춘에서 이시하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은 향후 만주에 신국가를 건설한다는 신국가건설회의를 열었고,
청의 마지막 황제인 아오신기오로 푸이를 중심으로 오족협화의 실현을 구체화했다.
그렇다 만주국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이었다.
이렇게 폭주하는 관동군을 보며 아다치 겐조는 이러한 군부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정당정치인 모두가 힘을 합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구체화하는 협력내각운동을 진행했다.
당시 여당인 입헌민정당과 야당인 입헌정우회는 정권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경쟁하던 사이였기에
2차 와카츠키 내각이 이를 수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입헌민정당과 내각이 모두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결국 아다치는 내무대신에서 사임했고 입헌민정당을 탈퇴하여 국민동맹이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이 이야기는 결국 관동군 입맛 맞춰주려 한 와카츠키 내각의 노력이 무의미했음을 반증하기도 하겠다.
여기에 더해 10월 사건이 터지며 진짜 이대로면 육군이 나라를 집어삼키겠구나 느낀 내각은
결국 입헌정우회와 손을 잡게 되었다.
다나카 기이치가 당대표가 된 이래 육군과 어느 정도 커넥션이 있던 입헌정우회였고,
그렇기에 입헌정우회와 입헌민정당이 합쳐져 대중의 지지 아래 군부를 제어한다는 계획은 나쁘지 않아보였을지 모르겠다.
1931년 12월 정우회와 민정당의 합의로, 2차 와카츠키 내각이 퇴임하고 이누카이 내각이 출범했다.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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